원미산 지양산 매봉산 신정산(2024.4.3)천상(天上)의 화원(花園)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기적절할 때 찾았던~

들산바람 2024. 4. 11. 14:57

 

원미산 진달래축제는 예년보다도 일찍 시작해서 일찍 끝이 났지만

산행도 할겸 2년만에 다시 찾았다.

 

 

 

원미산 진달래동산은 부천종합운동장역 2번출입구에서 5분 거리에 있다.

 

 

 

부천종합운동장역에서 원미산 진달래동산에 벚꽃이 피었는데

만개할려면 몇 일 더 있어야 할 듯..

 

 

 

원미산 진달래동산에는 진달래축제가 끝났고 비가 예보되어 있고

평일이라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라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은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이 진달래꽃 시를 쓰게 된 사연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소월에게는 9살 때 7년이나 연상의 처녀에게 장가를 간 외삼촌 경삼이 있었다.

외삼촌 경삼이 국내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는 동안 외숙모는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학비를 보내주었다.

마침내 외삼촌 경삼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신의주에 있는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였다.

외숙모는 남편으로부터 신의주로 오라는 소식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남편이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것이었다.

소월의 어머니는 설마하면서 동생 경삼을 찾아 신의주로 가 보니

소문이 사실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소월의 어머니와 외숙모는 그져 두 손을 마주 잡고 울기만 했다.

외삼촌 경삼이 외숙모를 헌신짝 버리듯하였지만

외숙모는 원망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며느리 도리를 다하면서 남편이 예전처럼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렸다는데

외삼촌 경삼은 외숙모를 버린 후 일 년이 못되어 죽었다.

소월은 외숙모의 마음이 너무 고와서 한 편의 시를 썼는데 그게 진달래꽃이다.

 

 

 

김소월(1902.8.6(음력) ~ 1934.12.24)은 본명 정식(廷湜).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하였다.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1923년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에 입학했으나,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1924년 〈진달래 꽃〉의 무대인 영변을 잠깐 다녀왔다.

김동인 김찬영 임장화 등과 영대(靈臺)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나도향과 친하게 지냈다.

광산일이 실패하자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했다.

땅을 팔아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했다.

그뒤 생활이 어려워져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1934년 32세 때 곽산에서 음독 자살했다.

 

 

 

 

 

 

 

 

 

아름다운 개나리꽃과 진달래꽃을 바라보는데

천상(天上)의 화원(花園) 같았다~

 

 

 

 

 

 

 

들바람! 원미산을 시기적절할 때 찾았지요~

 

 

 

부천종합운동장..

 

 

 

진달래꽃을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고 참꽃이라고도 하는데

두견화는 진달래꽃 붉은 빛이 두견새가 밤새 울면서

피를 토한 것이라고 해서 이름이 유래되었고

진달래꽃으로 만든 술을 두견주라고 한다.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볼 때면 술 생각부터 먼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원미산 진달래동산에서 원미정으로~

 

 

 

원미산(遠美山)은 멀미산 둔대산(屯垈山) 벼락산 춘덕산(春德山) 원미산(遠眉山)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신성하고 큰 산이라는데서 유래를 했고

원미정 아래에 원미산 정상석이 있다.

 

 

 

원미산(遠美山)은 경기도 부천시의 주산(主山)으로

원미동 소사동 춘의동 역곡동에 걸쳐 있으면

높이 167m 산..

 

 

 

 

 

원미산 지양산 매봉산 신정산 연계산행은 부천종합운동장역에서 시작해서

신정네거리역에서 마침..

 

 

 

 

 

부천종합운동장역 2번출입구에서 진달래동산으로~

 

 

 

 

 

지양산이 와룡산으로 표기된 것 같고 국기봉이 있다.

 

 

 

 

 

신정산에 위치한 계남 제1근린공원과 계남 제2근린공원 모두 찾아 보았는데

신정산 정상은 제1근린공원 장군정이다.

 

 

 

그동안 계남 제2근린공원은 지나쳤는데 이번에 처음 찾아보았다.

 

 

 

원미산 지양산 매봉산 신정산 연계산행을 신정네거리역 1번출입구에서 마침..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서 그동안 산행을 자주 못했지만

50대 초반 치고는 아직 들바람 체력 괜찮다는 생각~

 

 

 

 

 

의병장 박진 전승비(義兵將 朴震 戰勝碑)..

 

 

 

 

 

갈림길에서 좌측 으로 진행해서 역곡로 밑에 있는 터널로~

 

 

 

 

 

역곡로 터널을 나와서 도로를 건너서 봉배산으로~

 

 

 

봉배산 들머리..

 

 

 

봉배산 정상..

 

 

 

 

 

남산제비꽃은 쌍떡잎식물 이판화군 측막태화목 제비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주로 산지에서 자란다.

잎이 완전히 3개로 갈라지고 옆쪽 잎이 다시 2개씩 갈라져 마치 5개로 보인다.

각 조각은 다시 2~3개로 갈라지거나 깃털 모양으로 깊게 갈라져서

마지막 조각은 줄 모양이 된다.

턱잎은 줄 모양으로 넓으며 밑부문이 잎자루에 붙는다.

4~6월에 흰색 꽃이 피는데, 꽃잎 안쪽에 자주색 맥이 있다.

꽃은 잎자루 사이에서 몇 개의 가는 대가 나와서

그 여러 줄기 끝에 큰 꽃이 1개씩 달린다.

꽃받침은 바소 모양이고 그 끝은 뾰족하다.

꿀주머니는 원기둥 모양이고 다소 길며 수술은 5개,

암술은 1개, 꽃받침조각은 5개이다.

열매는 삭과이고 털이 없다.

 

 

 

남산제비꽃은 서울 남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이름이 붙여졌는데

한방에서 오한, 간기능 촉진, 태독, 감기 등에 약재로 쓴다.

 

 

 

 

 

 

 

작동터널 위..

 

 

 

지양산 정상..

 

 

 

 

 

 

지양산 국기봉..

 

 

 

 

 

 

 

궁동터널 위..

 

 

 

갈퀴덩굴은 쌍떡잎식물 용담목 꼭두서니과의 두해살이 덩굴식물로서

가시랑쿠라고도 하며 길가 또는 빈 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원줄기는 60~90cm로 네모지고 각 능선에 밑으로 향한 가시털이 있어

다른 물체에 잘 붙는다.

잎은 줄기의 각 마디에 6~!8개씩 돌려나고 거꾸로 선 바소꼴이며

길이 1~3cm, 나비 1.5~4mm로서 잎자루가 없고

가장자리와 뒷면의 맥 위에 가시가 있다.

5~6월에 잎겨드랑이에 홍록색 꽃이 취산꽃차례를 이룬다.

수술은 4개이며, 작은꽃대에는 꽃받침 밑에 마디가 있다.

씨방은 2실이고 암술대는 둘로 나뉘고 암술머리는 둥글다.

열매는 2개가 함께 붙어 있으며 각각 반타원형이고

갈고리 같은 딱딱한 털로 덮여 다른 물체에 잘붙는다.

 

잡초처럼 취급을 받는 갈퀴덩굴은 봄에는 어린 순을 나물로 먹기도 하는데

한방에서는 말린 것을 산완두(山豌豆)라고 하고

신경통이나 암종류의 한약 재료로 쓰인다.

 

 

 

매화나무가 있어서 이름이 유래된 매봉산 정상..

 

 

 

매봉산(每奉山)은 서울특별시 양천구와 구로구 경계에 위치한 높이 108m 산..

 

 

 

매봉산에서 바라본 북한산..

 

 

 

매봉산에서 바라본 관악산..

 

 

 

개나리는 한국이 원산지이고 학명은 Forsythia Koreana,

영어로는 Korean Forsythia라고 한다.

 

개나리는 수꽃과 암꽃이 있다.

 

수술이 암술 위로 솟은 것은 수꽃이고,

암술이 수술 위로 솟은 것은 암꽃이다.

 

 

 

개나리 수꽃..

 

 

 

개나리 암꽃..

 

 

 

갈림길에서 신정산으로~

 

 

 

 

 

남부순환도로 육교를 지나서 오류중학교로~

 

 

남부순환도로 육교에서 바라본 매봉산 나들머리..

 

 

 

오류중학교 담장에 고척로 27길 갤러리가 있다.

 

 

 

한국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이인성 유택(幽宅)은 망우리공동묘지에 있는데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연계산행을 하면서 여러 번 찾았다.

 

이인성(李仁星)은 1912년 경상북도 대구(大邱)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수채화의 개척자로 꼽히는

서동진(徐東辰)에게 사사했다.

1929년 18세의 나이에 수채화 《그늘》로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첫 입선하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세모가경》이 특선을 받았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귀하게 여긴 대구 유력자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가 도쿄의 오오사마 상회라는 미술용구 회사에 취직하는 한편

이듬해인 1932년부터 1935년까지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야간부에 입학해

미술공부에 정진했다.

 

이인성은 1932년 《카이유》라는 작품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또다시 특선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

(여름 어느 날)을 출품해 입선했다.

그는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를 시작으로 1944년 제23회

마지막 조선미술전람회까지 단 한 차례로 거르지 않고 3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출품해 입선과 6회 연속 특선, 그리고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더불어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에서도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거머쥐었다.

가난 때문에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관전을 통해

그의 실력을 인정받기 원했고, 잇단 입상으로 ‘조선의 보물’.

‘화단의 귀재’라는 수식어를 달며 당대 제일의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인성은 1935년 귀국해 일본에서 의상 디자인을 공부한 김옥순과 결혼했다.

김옥순은 대구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딸로, 그의 아버지 김재명은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한 대구 남산병원의 원장이었다.

김재명은 남산병원 3층에 사위의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으며,

1936년에 이인성은 그곳에 ‘이인성 양화 연구소’를 열었다.

미술학교 하나 없던 시절에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양화 연구소를 만들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자 그의 필력은 더욱 피어났다.

그러나 1942년 아내와의 사별 이후 그의 화필은 힘이 꺾였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

검문하던 경찰관과 시비가 붙어 경찰관의 어이없는

총기 오발로 죽음을 맞았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이인성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사람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시절에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시기 한국 화단은 추상화 물결이 거세게 일어 구상화가 대부분인

그의 작품은 주목받지 못했다.

관전을 중심으로 한 그의 활동 역시 관전 작가라는 꼬리표와 함께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 작가인 김환기(1913∼1974), 박수근(1914∼1965),

이중섭(1916-1956) 등이 대중들로부터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혀 잊혀가는 작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인성은 한국 근대미술의 도입기이자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일제 강점기 동안 그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화가였다.

우선 그는 수채화로 독특한 자기 표현양식을 확립했다.

수채화로 보여주기 힘든 강렬한 원색의 사용과 뚜렷한 명암법,

그리고 짧고 촘촘한 붓 터치로 수채화가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

또한 일본 유학시절에 접한 서구의 인상주의와 야수파, 표현주의,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한국적 토속성과 결합시켜 향토적 서정주의를 구현했다.

인물 표현에서도 자기 주변의 인물을 대상으로 삼아

한국적인 인물상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고갱’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거칠면서도 강렬한 필법과

치밀한 공간 구성능력, 토속적인 색조미로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미적으로 승화시킨 그는 일제 식민지 시기의 가장 출중한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가 남긴 주요 작품에는 (가을 어느 날)(1934), (여름 실내에서)(1934),

(경주의 산곡에서)(1935), (실내)(1935), (한정)(1936), (애향)(1943년경),

(해당화)(1944), (빨간 옷을 입은 소녀)(1940년대) 등이 있다.

 

 

 

오류중학교에서 신정산으로~

 

 

 

 

 

 

 

신정산 나들머리에서 계남 제2근린공원과 계남 제1근린공원으로~

 

 

 

 

 

 

 

신정산 계남근린공원에 있는 고인돌 선사유적지..

 

 

 

 

 

 

 

 

 

신정산 계남 제2근린공원..

 

 

 

토끼를 바라보는데 마눌님과 함께 2달 전에 찾았던 시화달전망대 생각이~

 

 

 

계남 제1근린공원 장군정이 있는 곳이 신정산 정상..

 

 

 

종지나물은 쌍떡잎식물 측막태좌목 제비꽃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서

1945년 8·15광복 이후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귀화식물로

한국 토착종인 제비꽃류와 비슷하게 생겼다.

높이 20cm까지 자란다.

잎은 밑동으로부터 나오며 잎자루가 잎의 길이보다 길다.

잎은 종지 모양 혹은 심장 모양이며 끝이 뾰족하고 가장자리에는 자잘한 톱니가 있다.

꽃은 보라색으로 4∼5월에 피는데 이따금 흰색이나 황록색 꽃이 피기도 한다.

열매는 긴 타원형의 삭과(殼果)로 7월에 익는다.

씨는 검은 갈색이다.

원산지는 북아메리카로 산과 들에서 자란다.

포기나누기나 씨앗으로 번식한다.

 

 

 

종지나물은 심장 모양 잎이 종지를 닮았다고 종지나물이다.

미국제비꽃이라고도 한다.

뜰에 심어 가꾸고, 절로 퍼져 자라기도 한다.

부드러운 잎은 쌈이나 무쳐 먹는다.

다른 나물과 데쳐서 무치기도 한다.

쓴 나물과 섞으면 맛이 잘 어우러진다.

잎과 꽃을 수놓아 꽃전도 부친다.

 

 

 

신정산 정상 계남 제1근린공원 장군정에서 신정네거리역으로~

 

 

 

산행을 마치고 술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날 장인으른 기일이라서

꾹 참고 전철을 타고 곧바로 귀가~

 

 

 

봄날 / 김호균

 

고개를 넘자

봄 밭에서

라면발 같은

아지랑이 어질어질하다

 

무덤 속에서

허리 지지고 누워있던 사람 하나

한숨 잘 잤다며

벌떡 일어나

살아 돌아올 것 같다

 

노랗게 핀 개나리꽃과 온 산을 울긋불긋 물들인 진달래꽃을 바라보는데

천상(天上)의 화원(花園)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기적절할 때 찾았던 산행~

 

언제 : 2024년 4월 3일

어디 : 부천종합운동장역 2번출입구-원미산 진달래동산-원미정-

네거리쉼터-춘덕약수-역곡로-봉배산-작동터널-지양산 국기봉-

궁동터널-매봉산-남부순환도로-오류중학교-신정산 고인돌-

신정산 계남 제2근린공원-계남 제1근린공원-장군정-

신정3동주민센터-신정네거리역 1번출입구

산행 시간 : 09시 35분~13시 37분

날씨 : 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