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여행(2023.2.14)명성황후생가 효종대왕릉 세종대왕릉 신륵사

들산바람 2023. 2. 20. 22:21

마눌님과 함께 애마를 타고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 효종대왕릉, 세종대왕릉, 신륵사를 찾았는데 무리가 없었다.

 

 

명성황후 생가 관람코스는 명성황후 기념관-명성황후 생가-민가마을-감고당-소원바위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조선 말기 제26대 왕 고종의 비(妃)로 고종의 황제 즉위 이후 명성황후라 칭해졌다.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閔)씨이며,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변에 알려졌다. 16세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하 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고종 비(妃/이하 비)에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궁인 이씨로부터 완화군(完和君)을 얻고 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비는 예의범절이 밝아 칭송을 받았다. 완화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이를 기뻐하였고 비는 이에 분개하여 불만을 가졌고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후에 원자가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요절하자 그 원인을 가지고 대원군과 더욱 대립하였다. 비는 대원군의 반대파인 민승호,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 그 아들 재면(載冕), 조대비의 조카 조성하, 대원군의 반대 세력인 김병국, 조두순, 이유원 등을 규합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일본 세력의 침투가 점차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들을 궁중에 잠입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일본 낭인들은 그녀의 시신을 궁궐 밖으로 옮겨 소각하였다(을미사변 乙未事變).

 

 

명성황후 기념관..

 

 

 

 

 

 

명성황후(明成皇后) 어릴 때 이름은 민자영..

 

 

 

 

 

 

 

 

 

 

 

 

 

 

 

 

 

 

 

 

 

 

 

 

명성황후 기념관 특별기획전시실에서 명성황후 한글 친필을 전시하고 있는데

세종대왕릉이 여주시에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명성황후 기념관 특별기획전시실에 전시된 한글은 모두 명성황후의 친필..

 

 

 

 

 

 

 

 

 

 

 

 

 

 

 

 

명성황후 생가, 효종대왕릉, 세종대왕릉, 신륵사는 가까이에 있어서

서울에서 당일치기 여행도 무리가 없다.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生家)..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生家)는 경기도 여주시 명성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성황후가 태아나서 여덟 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 誕降 舊里碑)..

 

 

 

 

 

 

민유중 신도비(閔維重 神道碑)..

 

 

민가마을..

 

 

감고당(感古堂)..

 

 

 

 

 

 

감고당(感古堂)..

 

 

인현왕후와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감고당(感古堂)은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조 건물로 본래 서울 안국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한 것이다.

 

 

 

 

소원바위..

 

 

명성황후 생가를 관람하고 나서 애마를 타고 그동안 만나보고 싶었던 효종대왕릉과 세종대왕릉으로 이동~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 모두 영릉이라고 하는데 한문으로는 다르다.

 

 

효종대왕릉과 세종대왕릉은 서로 700m 떨어져 있는데 먼저 효종대왕릉을 찾았다.

 

 

英陵(영릉)은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

寧陵(영릉)은 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 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

 

 

갈림길에서 효종대왕릉으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은 700m 떨어져 있다.

 

 

 

 

여주 효종 영릉재실(驪洲 孝宗 寧陵齋室)은 보물 제1532호..

 

 

 

 

 

 

 

 

寧陵(영릉)은 조선 제17대 왕 효종(孝宗 1619~1659)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 )은 이름은 휘(諱) 호(淏). 자 정연(靜淵). 호 죽오(竹梧). 시호 명의(明義). 인조(仁祖)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지고,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세자(世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있었다.

인조의 미움을 받은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와 1645년 갑자기 변사(變死)하자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인조가 죽자 조선 제17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효종대왕은 재위 10년 동안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데 온 힘을 쏟았는데,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 훈련 강화에 힘썼으며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널리 쓰이게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효종대왕은 대군시절에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8년간 생활하면서 국제경험을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벌(北伐)을 계획하면서 군사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두었다. 효종의 북벌 의지는 송시열의 '기해독대'에서 잘 나타나는데, 효종은 정예화된 포병 10만 명을 길러 기화기 있을 때 오랑캐들을 곧장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은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효종대왕의 이러한 꿈은 효종이 41세 때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다.

 

효종(孝宗)의 북벌론(北伐論)과 송시열(宋時烈)의 북벌론(北伐論)은 대의명분(大義名分)이 달랐다.

 

효종(孝宗)의 북벌론은 청에게 무릎 꿇고 8년 동안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 복수를 마음 속에 다졌다.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고 청나라의 혼란스러운 이때가 북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군사를 늘리며 훈련도 강화하고 북벌을 추진했지만 신료들은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청나라 북벌 계획은 효종이 갑자기 서거하는 바람에 막을 내렸다.

 

송시열(宋時烈)의 북벌론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에서 추진되었다. 명나라와 조선은 군신관계(君臣關係)이고 임진왜란 때 구원병 파견해 주었고 명을 멸망시킨 청나라는 원수라고 생각해서 북벌론을 주장했다.

 

역사(歷史)에 가정(假定)이 없지만 효종의 북벌론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지만 계획한 대로 추진되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에게 수모를 당하지도 않았고 남북 분단도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영릉 비각(寧陵 碑閣)..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능..

 

 

효종대왕릉..

 

 

효종대왕릉을 나와서 왕의 숲길을 따라서 세종대왕릉으로~

 

 

숙종 영조 정조는 왕의 숲길을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는 英陵(영릉)..

 

 

영릉 비각(英陵 碑閣)..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고, 시호는 장헌[莊憲, 정식 명칭은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비(妃)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3년(태종 13)에 대군이 되었다. 1418년(태종 18)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같은 해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아 즉위하였다. 양위 이후 태종은 4년간 상왕으로 생존하여 어려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세종시대는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이고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측우기와 같은 과학 기구가 제작되는 등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문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많은 조선시대 왕릉 중에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잠들어 있는 英陵(영릉) 만큼 가까이 볼 수 있는 왕릉이 없는 것 같다.

 

 

 

 

 

 

英陵(영릉)은 조선 제4대 왕 세종과 호헌왕후의 능..

 

 

 

 

구(舊) 여주 세종 영릉재실(驪洲 世宗 英陵齋室)..

 

 

 

 

신(新) 여주 세종 영릉재실(驪洲 世宗 英陵齋室)..

 

 

 

 

 

 

 

 

 

 

 

 

영릉을 찾아보고 나서 애마를 타고 천년 고찰 신륵사로~

 

 

鳳尾山 神勒寺(봉미산 신륵사)..

 

 

 

 

不二門(불이문)은 사찰에서 본당에 들어서는 마지막 문이라는 뜻과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문을 본당에 들어서는 곳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부처님이 계시는 불국토(佛國土)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은 하나이다. 이같은 불이(不二)의 뜻을 알게되면 해탈할 수 있으므로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신륵사(神勒寺)는 경기도 여주시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사찰로서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神勒寺)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다층전탑 앞에는 수령 약 600백년 된 은행나무와 참나무가 있는데

오래된 은행나무는 많지만 이렇게 오래된 참나무는 드문 것 같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驪州 神勒寺 多層石塔)은 보물 제225호..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은 보물 제180호..

 

 

 

 

신륵사 조사당 앞에 있는 향나무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경기도 보호수이다

 

 

여주 신륵사(驪州 神勒寺)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앞 석등(石燈),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 좌측부터 보물 제231호, 보물 제 228호, 보물 229호..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은 보물 제 226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는 보물 제230호..

 

 

 

 

 

 

남한강(南漢江)..

 

 

 

 

남한강은 한강의 본류이며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 금대산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충척북도 동북부와 경기도 남부를 흘러 양평군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류를 한다.

 

 

신륵사를 마지막으로 여주여행을 모두 마치고 귀경하기 전에 저녁을 여주 신륵사 상가지구에 있는 산너머 남촌에서 가마솥 곤드래정식(13,000원)을 먹었는데 반찬이 무려 21가지였고 맛 또한 좋았다~

 

 

나 가거든(명성황후 OST) / 작사 김은경, 작곡 이경섭

 

쓸쓸한 달빛아래
내 그림자 하나 생기거든
그땐 말해 볼까요 이 마음
들어나 주라고
문득 새벽을 알리는
그 바람 하나가 지나거든
그저 한숨 쉬듯 물어 볼까요
난 왜 살고 있는지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나 슬픔까지도 사랑했다
말해 주길

흩어진 여울처럼
내 아픈 기억도 바래지면
그땐 웃어질까요 이 마음
그리운 옛일로
저기 홀로선 별 하나
나의 외로움을 아는 건지
차마 날 두고는 떠나지 못해
밤새 그 자리에만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간
그 이유
나 가고 기억하는 이
내 슬픔까지도 사랑하길 우

부디 먼 훗날
나 가고 슬퍼하는 이
내 슬픔 속에도 행복했다

믿게 해

 

그동한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명성황후 효종대왕 세종대왕을 만나서

한참동안 마음이 무척 설레이었고 아름다운 천년 고찰 신륵사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보물을 보았고 아주 뜻깊었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