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눌님과 함께 서울에 살면서도 그동안 가보지 못한
석촌동 고분군, 봉은사, 선정릉을 찾았는데
축복이라도 하듯 날씨가 무척 포근했다~
석촌동 고분군은 석촌고분역과 석촌역 사이에 있는데
석촌고분역 3번출입구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다.
서울 석촌동 고분군 안내도..
서울 석촌동 고분군 안내도..
서울 석촌동 고분군(石村洞 古墳群)은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에 조성된 백제시대 고분군으로 1975년 5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백제시대의 대형 돌무지무덤(積石塚) 7기와 함께 널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등이 30여 기 이상 확인되었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석촌동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 이 고분군 지역에는 3, 4호분과 같은 대형분 이외에도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 관리의 것도 섞여 있다. 그리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되게 형성된 것도 있어서 석촌동 일대는 오랫동안 다양한 계급의 사람의 묘지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석촌동 고분군에서 제일 거대한 3호분은 긴변 45.5m, 짧은변 43.7m, 높이 4.5m의 규모로 형태는 사각형 기단형식의 돌무덤이다. 기단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4호분은 한 변이 23~24m의 정사각형으로 연대는 3호분과 비슷한 시기로 보이나, 널무덤과 판축기법을 가미하여 순수 고구려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밖에 1987년에 조사된 1호분의 경우 왕릉급의 대형 쌍분임이 확인되었다. 그 쌍분 전통은 압록강 유역이 환인형 고력묘자촌에 보이는 이음식돌무지무덤과 연결되고 있어 백제 지배 세력이 고구려와 관계가 깊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준다.
석촌동 고분군은 대체로 3세기 중·후반경부터 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특히 300~400년의 약 100년 동안은 백제 지배 세력에 의해 돌무지무덤 위주의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 후 공주 천도(475)까지의 백제 지배 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바뀐다. 근처 방이동(芳荑洞)백제고분군과 가락동(可樂洞) 등지의 무덤이 이러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석촌동 일대에는 널무덤·독무덤 등의 소형 고분이 계속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석촌동 고분군 주위에 롯데월드타워와 석촌호수가 있다.
석촌동 제3호 고분..
석촌동 제4호 고분..
석촌동 제2호 움무덤..
석촌동 제2호 고분..
석촌동 제5호 고분..
석촌동 제1호 고분은 발굴 중..
석촌동 제3호 움무덤..
석촌고분역 주위에 있는 담소 소사골 순대 육개장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괜찮았다~
봉은사는 9호선 봉은사역 1번출입구에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다.
봉은사는 삼성중앙역과 봉은사역 사이에 있다.
봉은사(奉恩寺)는 서울시 강남구 수도산에 위치한 사찰로서 794년(원성왕 10) 신라시대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하여 견성사(見性寺)라고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1498년(연산군 4)에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선릉(宣陵:成宗陵)을 위하여 사찰을 중창하였다.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가 주도하여 견성사 터가 명당이라 하여 수도산 아래로 옮겼고 사찰의 명칭을 봉은사(奉恩寺)로 개칭하였다. 중종 때는 이곳에서 승과시(僧科試)를 치르던 곳이며 서산(西山) ·사명(泗溟) 두 대사도 여기서 등과하였다고 전해진다. 봉은사는 우리나라 선종(禪宗)불교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봉은사 하면 명진스님과 부정적인 생각이..
지장전(地藏殿)은 염라대왕 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主尊)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고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일컫는다.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서 시왕전이라고 한다.
영산전(靈山殿)은 석가여래께서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說)하시고 계신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나한(羅漢)님을 모시기 위한 법당..
마눌님과 함께 봉은사 뒤에 있는 수도산을 올랐는데 날씨가 포근해서 땀이 났다~
서울시 강남 속의 봉은사..
들바람! 골돌히 무슨 생각을 하나요~
동안거(冬安居)나 하안거(夏安居) 때 스님이 바깥 출입을 삼가하고 수행하는 곳 같은데 문이 잠겼다.
판전(板殿)의 현판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사망하기 3일전에 쓴 것..
봉은사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와서 선정릉으로~
선정릉을 찾기 위해서 선정릉역 3번출입구를 나와서
정문이 반대편에 있어서 한참동안 걸었는데
선릉역에서 진행하면 가깝다.
선정릉(宣靖陵)은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선릉과 정릉을 합한 능호인데
선정릉역과 선릉역 사이에 있다.
선정릉은 관람시간이 06시부터인데 왕릉 중에서 가장 빠르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진행해서 선릉을 먼저 찾아보고 나서 정릉으로~
재실..
수령이 500년된 은행나무.
선릉 홍살문..
선릉(宣陵)은 조선 제9대 왕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1462~1530)의 무덤..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懿敬世子) 이장(李暲)과 한확(韓確)의 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4개월 만에 죽자 13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469년부터 1476년까지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1479년(성종 10)에 세자 융(imagefont, 뒷날의 연산군)의 생모인 제헌왕후 윤씨를 폐비하고 윤호(尹壕)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다시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1482년(성종 13)에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하였는데, 이 일은 뒷날 연산군 때에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교육과 문화의 진흥에 힘을 기울여 세종과 세조 연간에 기틀이 형성된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승려들을 엄하게 통제하고 사찰을 폐쇄하는 등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법령의 정비에도 힘써 유교적 통치 질서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474년(성종 5)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완성하여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더욱 보충하여 《대전속록(大典續錄)》을 간행하였다. 서적의 간행도 활발히 추진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동문선(東文選)》, 《오례의(五禮儀)》,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을 편찬·간행하였다.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등 북방 방비에도 힘썼다. 1479년(성종 10) 윤필상(尹弼商) 등을 통해 압록강 인근의 여진족을 소탕했으며, 1491년(성종 22) 허종(許琮)을 통해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을 진압하였다.
성종은 재위 25년째인 1494년 음력 12월 24일에 38살의 나이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사망했다. 죽은 후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선릉(宣陵)에 매장되었다.
정현왕후릉(貞顯王后陵)..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은 조선 제11대 왕으로 1506년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왕에 추대되어 즉위하였다. 연산군 시대의 폐정(弊政)을 개혁하였으며, 나라의 남북에서 외환이 그치지 않아,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三浦倭亂), 1522년 동래(東萊) 염장(鹽場)의 왜변(倭變), 1524년 야인(野人)의 침입, 1525년 왜구(倭寇)의 침입 등이 잇달았다.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조하고, 지방의 사실(史實)을 기록하기 위하여 외사관(外史官)을 임명하였으며, 1540년(중종 35) 역대 실록(實錄)을 인쇄하여 이를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중종의 치세에서 처음에는 어진 정치를 펴는 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 이후 간신(奸臣)들이 판을 치는 통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여 볼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능은 경기 고양(高陽)으로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에 이장하였다. 능호는 정릉(靖陵)이며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선정릉 탐방을 마지막으로 모든 여정을 마치고 귀가를 했는데
날씨 만큼이나 모든 것이 참 좋았던 하루였다~
해가 지면 생각나는 사람 / 김자은
모래가 바람에 흩어지고
바람에 꽃잎 떨어져도
마음과 마음 꼭 붙잡은 우리
한 톨의 씨앗으로
하늘과 땅에 맹세 했지요
해지는 저녁이면
풀 뜯던 염소가 집으로 돌아오듯
땀 냄새 앞세워 등 굽은 아버지가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오듯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돌아올 내 집은
당신입니다
마눌님과 함께 석촌동 고분군, 봉은사, 선정릉을 찾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쉬엄쉬엄 걸었는데
날씨 만큼이나 모든 것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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