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2026.3.30)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곳..

들산바람 2026. 4. 8. 23:42

한국천주교의 발상지 천진암 성지는 경기도 광주시 천진암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강선 경기광주역 앞에서 432번버스가 천진암 성지로 운행을 하고 있다.

 

천진암 성지 정문 좌측은 광암성당..

 

천진암 대성당 건립터 앞에서 우측으로 순례를 했다.

 

 

 

 

 

 

천진암 성지 순례는 오후 4시까지 입장을 해야 한다.

 

광암성당(曠菴聖堂)은 이벽 세례자 요한의 호를 따서 지은 성당..

 

 

 

 

 

 

베로니카(Veronica)는 예루살렘 출신의 전설적 성녀. 생몰연대 미상.

12년에 걸친 장혈의 병(혈우)을 예수 그리스도가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외전의 『빌라도 행전』 7장에 나오는데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 화가를 방문하는 도중,

예수를 만나 그림을 그릴 천을 그에게 건네주고 다시 돌려받자,

거기에 예수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녀는 그 천으로 황제 티베리우스의 중병을 낫게 했는데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의 길

도상의 예수의 피와 땀을 자신이 쓰고 있던 손수건으로 닦자,

그 천에 예수의 얼굴이 남았다고 한다.

베로니카라는 말은 이 여성의 이름과 천에 찍힌 예수의 초상의 양쪽을 의미하며,

라틴어의 베라 이콘(vera icon, 참된모습이라는 뜻)에서 파생했다고 한다.

한편 미술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있는 천을 펼치거나,

예수의 얼굴을 닦는 장면들이 그려진다.

축일은 7월 12일.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전 건립터..

 

천진암 성지 순례 순서..

 

천진암 성지 주차장-광암성당-대성당 건립터-천진암터,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묘역-

조선교구 설립자 성인묘역 및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가족묘역-세계 평화의 성모상-

성모성당-광암성당-천진암 성지 주차장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전 건립터와 세계 평화의 성모상..

 

 

 

한국천주교 창시 200년 기념 비문 내용..

 

韓國天主敎發祥地天眞菴址 /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터

韓國天主敎會創立聖祖李檗 / 한국천주교회 창립 성조 이벽

韓國天主敎創始二百年紀念 / 한국천주교 창시 200년 기념

 

 

 

 

講學堂(강학당)은 유생들이 모여 경전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으로

지금의 세미나(Semina)실과 같은 곳..

 

李檗聖祖 講學堂 址(이벽성조 강학당 터)..

 

 

천진암터,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묘역..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묘역에는 선암 정약종 아구스티노, 만천 이승훈 베드로,

광암 이벽 요한 세례자, 직암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녹암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모셔져 있다.

 

 

 

선암 정약종(選庵 丁若鍾, 1760년~1801년 2월 26일)은 본관 나주(羅州),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의 셋째 아들로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 정약현과 정약전이 있고 동생 정약용이 있다.

젊어서는 성호 이익 밑에서 성리학을 공부했다.

1786년에 정약전의 권유로 로마 가톨릭교회 세례를 받으면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795년 이승훈과 함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를 맞아들이고

한국 최초의 조선천주교 회장을 지냈다.

특히 조선 천주교인으로는 최초로 순 한글로 된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 상,하권을 지어 전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한자를 모르는 신자나 부녀자,

어린아이들도 쉽게 천주교 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형제중 가장 늦게 천주교인이 되었으나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유지하다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諡福)되었다.

 

만천 이승훈(蔓川 李承薰, 1756년~1801년 4월 8일)은 본관은 평창(平昌),

세례명은 베드로이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방(盤石坊) 중림동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마재[馬峴]의 정재원(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 약현(若鉉) 약종(若鍾) 약용(若鏞)과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 때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이 남인 소장학자들 사이에

활발히 연구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서학에 접하게 되었다.

또한 서학 모임의 중심 인물인 이벽(李檗)과도 자연 친교를 맺어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

약 40일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선교사들로부터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뒤,

그라몽(Gra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수십 종의 교리서적과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默珠) 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과 상의하여 명례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신앙집회소로 정하고

정기적인 신앙의 모임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1790년 음서로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2월 서부도사를 거쳐

6월에 평택현감이 되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이 일어나 천주교 서적을 조선에 전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충청남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풀려났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1801년 신유박해로 이가환 정약종 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체포되어 4월 8일 서대문 밖 형장에서 대역죄로 참수되었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고종 5)에 아들 신규(身逵)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하고,

1871년에 증손인 연구(蓮龜), 균구(筠龜)이 제물포에서 순교하였다.

 

광암 이벽(曠庵 李檗, 1754년~1785년)은 본관은 경주(慶州),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경기도 포천 출신.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정약현(丁若鉉)의 처남이다.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 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 정약용 이승훈(李承薰), 권철신(權哲身),

권일신(權日身) 등과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다.

1777년(정조 1) 권철신 정약전(丁若銓) 등 기호 지방의 남인 학자들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실학적인 인식을 깊이 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다.

이 때 이벽이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 학자들에게 전하여,

후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784년 이승훈의 부친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이승훈을 함께 보내 세례를 받아올 것을 부탁하고 그 절차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오자,

다시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벽은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신자가 되었고,

한편 그가 가지고 온 서적을 깊이 연구하여

서학을 종교로서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을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나고,

1785년에 명례방 사건이 발생하자 부친에 의해 가택연금 되어

33세로 순교하였다.

 

직암 권일신(稷庵 權日身, 1742년~1791년)은 양근(楊根) 출생, 본관은 안동(安東),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관찰사 권암(權巖)이고, 형이 권철신(權哲身)이며,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의 사위이다.

남인계의 학자로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1782년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그 뒤 이벽 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해 충청도 내포(內浦)의

이존창(李存倉)을 입교시키고, 또 전주의 유항검(柳恒儉)을 개종시켰다.

1785년에는 서울 명례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식으로 교회 집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그 뒤 1787년에 이벽이 사망하자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조동섬(趙東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8일간 피정(避靜: 도피해 조용히 지냄)하면서

신앙을 더욱 두텁게 하였다.

그리고 추조적발사건으로 흩어졌던 초대 교회의 주역들인 이승훈,

정약용(丁若鏞) 형제 등과 함께 더욱 견고한 교회의 건설을 위해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세웠다.

최창현(崔昌顯)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욱 열심히 천주교 포교에 전력하다가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홍낙안(洪樂安).

목만중(睦萬中)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그 뒤 예산으로 유배가던 중 혹심했던 장독으로 인해 주막에서 사망하였다.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난 학자로서 서학에 일생을 종사하다가 순교한 것이다.

 

녹암 권철신(鹿庵 權哲身, 1736년~1801년)은 양근(楊根) 출생, 본관은 안동(安東),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관찰사 권암(權巖)이고, 동생은 권일신(權日身)이다.

이익(李瀷), 이병휴(李秉休)의 문인이다.

정통주자학을 비판, 양명학(陽明學)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선학들의 학문 방법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경전 해석을 하여

유학의 한계를 극복해 갔다.

이러한 학문과 사상적 바탕 위에 서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

1777년(정조 1)부터 경기도 여주 앵자산(鶯子山)에 있는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

김원성(金源星),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이벽(李蘗), 이윤하(李潤夏) 등

남인계 학자들과 서학교리연구회를 가지면서 중국에 전해진 서양의 철학, 수학,

종교 등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연으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혹은 珍山事件)로 동생 권일신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이 순교했지만, 직접적인 포교에 관여하지 않고

학문과 교리를 통하여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위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행(學行)으로 많은 동향인들을 천주교에 입교하게 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형벌에 못이겨 교를 배반했다는 말을 듣고는

반평생의 업적이 무익해졌음은 물론, 순교의 영광스런 화관을 잃었다며

애통해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과 함께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정약종·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최관천 등과 함께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이해 2월 26일 옥중에서

장독으로 죽었다.

이익의 제자로 남인학파의 연장자이며 지도자로서 가족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서학파(西學派)의 대가로 손꼽힌다.

 

 

李檗聖祖讀書處址(이벽성조독서처지) / 성조 이벽이 기거하면서 독서하였던 곳

 

하루만 지나면 4월인데 계곡이 얼어 있어 신기할 따름..

 

천진암터,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5위 묘역과

한국천주교회 조선교구 설립자 성인묘역 갈림길..

 

 

 

한국천주교회 조선교구 설립자 성인묘역..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 정하상 바오로, 복자 정철상 가를로 / 좌측부터..

 

유진길(劉進吉, 1791년 ~ 1839년 9월 22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

유진길은 한양에 있는 조상 대대로 역관을 지내온 한 중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 중에서 벼슬을 지냈던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며,

103위의 성인들 중에 가장 어린 13살의 순교자인 유대철 베드로의 아버지이다.

1824년 10월에 동계 외교 사절단이 청나라로 가기 위해 준비를 마쳤다.

유진길은 그 기회를 놓칠수 없어서 자신이 통역관에 선발되는 것과

하인으로 양반 정하상이 하인으로 변장하여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쏟았다.

그 사절단은 무사히 베이징에 도착했다.

두 명의 천주교인이 그 무리를 빠져나와 베이징의 주교를 찾아갔다.

유진길은 청국어로 그에게 세례성사를 요청했다.

주교는 먼 곳에서온 그 손님들을 맞이한 것을 아주 기뻐하였지만

유진길이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기 위해

그에게 질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진길은 교리서에 있는 데로 정확히 질문에 답변했다.

"인간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경배하기 위해서이며

그들의 영혼을 구원 받기 위해서 입니다...

" 주교는 박해 받고 성직자도 없는 조선의 교회에서 그처럼 열정적이고

잘 교육받은 신자가 나올 수 있음에 경탄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유진길은 특별 미사 중에 세례를 받았다.

사제가 낭송했다.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 유진길은 마치 예수의 피가 전신의 혈관을 통해 흐르는 것처럼 느꼈다.

유진길과 정하상은 조선으로 돌아와서 남명혁을 비롯한

천주교 공동체들의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자초지종을 알렸다.

그 소식은 무너져가는 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유진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유대철 베드로이다.

후일에 그의 13살 된 장남 유대철은 한국 천주교의 103위 순교성인 중에

가장 어린 사람이 되었다.

1839년 7월에 유진길은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친척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배교를 간청했지만, 그는 그러기를 거절했다.

1839년 9월 22일, 유진길과 정하상은 한양의 서소문 밖으로 압송되었다.

유진길은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도 결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었다.

그는 마치 속세에 미련 없이 그저 묵상에 잠긴 사람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평온한 얼굴로 참수되었다.

 

정하상(丁夏祥, 1795년 ~ 1839년 9월 22일)은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평신도 신학자, 교회 지도자로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이다.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세례명으로 쓰일 때는 하상바오로로 한다.

정하상의 부친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의 처음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할만큼

학문과 문재가 모두 뛰어났는데, 정하상도 상재상서를 저술하여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부친 정약종과 형 정철상은 1801년 신유박해때 참형으로 순교하였다.

신유박해는 정순왕후가 남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사학 엄금교서를 내림으로써 발생한

천주교회 박해사건이다.

그럼에도 정하상의 모친 유소사는 자녀들에게 기도문(經文)을 가르침으로써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격려하였다.

하지만 이는 구전에 의한 교육이었으므로 체계적인 교의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천주교 탄압으로 천주교 서적이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교의를 배우는데 한계를 느낀 정하상은 신유박해 때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가 있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을 찾아가

천주교와 학문을 배웠다.

정하상은 1801년 신유박해때 중국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여

천주교회를 지도할 사제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실질적인 조선 천주교 교회의 지도자가 된 정하상은 역관의 종으로 위장취업함으로써

북경에 가서 천주교 사제가 조선에 오기를 청하였다.

조선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을 전하도록,

양반신분이었음에도 종이 되는 겸손함을 실천한 것이다.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9월 22일에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어머니 유소사와 누이 정정혜도 그 해에 순교함으로써

정약종 가족은 모두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순교자 가족이 되었다.

 

정철상(丁哲祥, 출생 ?~1801년)은 본관은 나주이며, 세례명은 가롤로이다.

경기도 광주의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정약종(丁若鍾)과

한산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839년에 순교한 유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계모이다.

정하상(丁夏祥) 성인과 정정혜(丁情惠) 성녀의 이복형이며,

포천 출신인 홍교만(洪敎萬) 복자(福者)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집안 어른이 천주교를 금지하고 신부를 고하라며 송곳으로 찌르기도 했지만,

정철상은 결코 신부를 고발하지 않았다.

이처럼 유명한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아버지 정약종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것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만 의미를 두었다.

그의 가족은 1795년에서 1798년 사이에 마재에서 광주 분원

(현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1794년 말에 입국한 주문모(周文謨) 신부는 몇 차례

정철상의 집을 방문하였고, 정철상도 서울의 최창현(崔昌顯) 집에서

여러 번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20세가량 되었을 무렵 신유박해(1801년)가 발생하였고,

이때 부친과 숙부들이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가자,

그는 의금부 인근에 머물면서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러자 이를 본 관리들이 “주문모 신부에 대한 일과

신부가 숨어 있는 장소를 말하면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며

그를 유혹했다.

그러나 정철상은 결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정약종이 처형된 1801년 4월 8일(음력 2월 26일),

정철상도 국청(鞫廳)의 명에 따라 체포되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이 후 한 달 이상 옥에 갇혀 있던 정철상은

1801년 5월 14일(음력 4월 2일) 동료 5명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 가족묘역..

 

 

 

세계 평화의 성모상..

 

 

천진암 성지 순례를 성모성당에서 마치고 주차장으로 되돌아가서

432번버스를 타고 경기광주역으로 이동해서 귀경을 했다.

 

432번버스가 경기광주역에서 천진암 성지를 오가고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어려움이 없이 찾을 수 있다.

 

강진에서의 18년 귀양살이를 끝내고 1818년 고향 마재에 돌아온 정약용 선생은

우선 젊었을 때 이벽 선생과 함께 자주 찾았던 천진암(天眞菴)에 와

"30여년만에 다시 찾아오니, 천진암은 이미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전혀 없구나(寺破無舊)" 하며 추억을 더듬었다.

 

귀양가기 전 일찍이 단오날 둘째 형 정약전 선생과 천진암을 찾았던 정약용 선생이

이벽 선생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李檗讀書猶有處(이벽독서유유처) /

천진암에 오니 전에 이벽이 늘 앉아서 글을 읽던 자리가 아직도 저기 있네

風流文采須靈境(풍류문채수영경 /

그때 짓던 시와 문장의 탁월한 그 풍류 문채는 정말 신비스러운 경지에 이르렀었지

半日行杯半日吟(반일행배반일음) /

그리하여 지금 또다시 한나절 내 술을 마시며 한나절 내내 읊어본다

 

부활절을 몇 일 앞두고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를 찾았는데

명문가의 자제들이 학문으로 받아들이면서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고

온갖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맞선 순교자들 때문에 지금 이땅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숙연함이 들었던 성지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