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릉원(扶餘 王陵園)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백제 때의 무덤들이며 부여에서 논산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산의 남쪽 기슭에 있다.
부여 왕릉원은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부여 능산리 고분군'으로 불렸으나,
2021년 9월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부여 왕릉원 탐방 순서는 매표소-부여왕릉원-의자왕단-
능산리사지-부여왕릉원 아트 뮤지엄-매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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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여왕릉원(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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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聖王, 재위 523~554)은 무령왕의 아들로 태어나,
3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왕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일을 잘 결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고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다.
백제의 부여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일본에 불교를 전하는 등, 대일관계에서도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의자왕(義慈王, 599년~660년)은 백제의 제 31대, 마지막 국왕이다.
이름은 부여의자(扶餘義慈)며 망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방탕과 실정으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초대 온조왕으로부터 이어진 백제는 멸망하였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수많은 백성들은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갔다.
부여 왕릉원(扶餘 王陵園)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백제 때의 무덤들이며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7기(基)는
3기씩 앞뒤 2열을 이루고 그 뒤로 1기가 떨어져 있으며,
1915~1937년 일본학자가 여러 차례 조사하였다.
이들 고분 중에는 산구릉의 남쪽 경사진 면에
남북으로 길게 직사각형의 석곽(石槨)을 쌓고
남쪽 벽 방향에 널길[羨道]을 만든 뒤,
원형의 봉토 아랫부분에는 호석(護石)을 두른 경우도 있다.
부여 왕릉원 1호분은 잘 물갈이한 편마암 벽에다 사신(四神)을 그렸는데,
이는 고구려 강서삼묘리고분군과 퉁거우(通溝)
사신총(四神塚)의 경우와 유사하다.
대부분 도굴되어 유물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두개골 파편, 칠(漆)을 한 목관(木棺)조각, 금동제 장신구 등이
소량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부여 왕릉원 매장방법은 1 ·2 ·3호는 어울무덤[合葬墓] 형태이고,
5호분은 홑무덤(單葬)으로 추정된다.
시신의 머리 방향은 북쪽을 향하고, 관이 놓인 바닥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깔아 놓았다.
만든 시기는 대략 6세기 중엽~7세기 중엽으로 보이는데,
편년이 가장 앞서는 2호분이 부여로 천도(遷都)한
성왕(聖王)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부여 왕릉원 무덤들은 이전에 고구려와 중국 남조를 통해 받아들인
문화적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이를 완전히 소화시킨 백제 후기
고분미술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의자왕단(義慈王檀)은 백제 사비시대 왕릉인 능산리고분군에 있는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의 가묘(假墓)로
2000년 9월 30일 조성되었다.
부여융(扶餘隆, 615년 ~ 682년)은 백제의 왕족이자 당나라 장군이다.
자는 융(隆) 또는 숭(崇)이라고도 한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에 귀순하여 백제 부흥운동 토벌에 협조하고
당나라의 백제군공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여 백제 유민들을 약탈하였다.
당나라에서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 대방군왕까지 임명됐으나,
당의 웅진도독부는 신라에 의해 한반도에서 축출되어 요동으로 이주했다.
부여융이 마지막 태자인지에 관해서는 학설 대립이 있다.
백제 부흥운동 토벌에 협조하고 백제 유민들을 약탈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왜 이곳에
가묘를 만들어 주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의자왕(義慈王, 599년~660년)은 백제의 제 31대, 마지막 국왕이다.
이름은 부여의자(扶餘義慈)며 망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 방탕과 실정으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초대 온조왕으로부터 이어진 백제는 멸망하였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수많은 백성들은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갔다.
백제를 망하게 하였던 의자왕(義慈王, 599년~660년) 가묘도
의자왕 아들 부여융과 마찬가지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
부여 나성(扶餘 羅城)과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를 바라보는데
세월의 무상함이 들기도 했다.
부여 나성(扶餘 羅城)과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
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와 석조사리감 (石造舍利龕)이 출토된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에 의하면 위덕왕 치세기인
567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 나성(扶餘 羅城)은 백제 수도 사비 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 시설이며,
수도의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하는 도성의 외곽성이다.
부소산성과 함께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가장 먼저 계획한
도성 시설물로 천도 이전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도성의 북동쪽을 감싸고 있으며,
지형에 따라 다양한 축조 공법이 적용되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는 백제문화제의 진수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가
출토된 곳이라서그동안 무척 궁금했었다.
부여 왕릉원 아트 뮤지엄은 가묘(假墓) 안에 있어서
왠지 으스스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계획했던 대로 해가 떨어지기 전에 탐방을 마쳤던
부여 왕릉원을 나와서 궁남지로 이동했다~
버린다는 것 / 예연옥
이삿짐 정리하다 낡은 책 펼쳐본다
유년의 편린들이 밑줄로 앉은 행간
애틋한
그리움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빛바랜 삶의 흔적 부서질 듯 흔들리다
명치끝이 아려오는 수 없는 이별 연습
품안에
자식 보내듯
집착 하나 떨군다.
부여 왕릉원 내에 있는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는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百濟 金銅大香爐)가
출토된 곳이라서 궁금증과 설레임을 찾았는데
왠지 세월의 무상함도 느껴졌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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