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천태산 산행을 마치고 나서 찾은 정지용 생가를 10년만에 다시 찾았는데
그동안 변한 게 없었고 눈에 익숙했고 무척 반가웠다.
정지용(鄭芝溶) 생가(生家)..
정지용(鄭芝溶, 1902.6.20~1950.9)은 1902년 6월 20일 충청북도 옥천(沃川)
하계리(下桂里)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정태국(鄭泰國)과
정미하(鄭美河)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연못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아명(兒名)을 지룡(池龍)이라고 하였고,
이름도 지용(芝溶)이라고 하였다.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9세 때인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2세 때인 1913년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했다.
17세 때인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휘문고보에 재학하면서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에 창간된 월간종합지 서광(瑞光)에 ‘3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정지용(鄭芝溶)은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京鄕新聞)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에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 결성된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어 강연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金起林).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사망 장소와 시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데, 1953년 평양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발행하는 통일신보는 1993년 4월에 정지용이 1950년 9월 납북 과정에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지용 생가를 마지막으로 충북 옥천 여행을 모두 마치고
풍미당으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고 귀경을 했는데
하루 여행 코스로 괜찮았다~
정지용 생가를 나와서 주위에 있는 옥천묵밥집을 찾았는데 휴가 중이어서
쫄면으로 유명한 풍미당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풍미당에서 마눌님께서는 물쫄면을
들바람은 비빔쫄면을 먹었는데
모두 괜찮았다~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짓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0년만에 다시 찾은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은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풍미당 쫄면은 생각보다 맛이 좋았고 당일치기 코스로 괜찮았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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