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화성행궁 북수동성당 수원순교성지(2023.1.3)역사 공부하는 느낌과 기도와 묵상을 하였던 여행~

들산바람 2023. 1. 9. 11:37

마눌님과 함께 수원화성 화성행궁 북수동성당 수원순교성지를 찾기 위해서

수원역 4번출입구를 나와서 13번버스를 타고 장안문 앞에 내렸는데

겨울날씨 치고는 그렇게 춥지 않고 바람도 없고 좋았다.

 

 

 

수원 화성(水原 華城)은 팔달산과 그 동쪽의 낮은 구릉과 평지를 감싸며 쌓은 평산성(평지와 산을 이어서 쌓은 성)으로 타원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의 전체둘레는 5.744km이고 높이는 4.9~6.2m이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게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게 되었다. 수원 화성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이 빗어낸 역작으로 동양 성곽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화성 건설에 관한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에 모두 담겨 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수원 화성의 그 방대한 공사를 2년 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다산 정약용이라는 젊은 실학자의 역할이 컸다. 그는 화성의 설계를 맡아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여러 서양의 건축을 참고하였다. 화성은 정약용의 설계를 바탕으로 채제공을 비롯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와 같은 유능한 실학자들의 젊은 패기와 기중기, 녹로와 같은 과학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졌다. 당시 건설된 주요시설물로는 문루와 옹성을 갖춘 4대문과 행궁, 암문, 수문, 연못, 장대, 공심돈, 각루, 포루, 봉돈, 궁대, 치성, 용도, 적대 등 48개소이다.

 

 

 

 

 

 

 

 

 

수원화성 탐방 코스는 장안문-화서문-서남암문-팔달문-화성행궁

 

 

장안문(長安門)은 조선시대 화성(華城)의 북문(北門)으로 건립된 중층누문(重層樓門)으로 하나의 홍예문(虹霓門)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 쪽으로 원형 옹성(甕城)을 갖추었다. 홍예 위로 4개의 누조(漏槽)를 설치하고, 성벽 위에는 안팎에 총구(銃口)를 갖춘 여장(女墻)을 쌓았다. 1920년대 수원시 시가지계획사업으로 문 좌우의 성벽이 헐리고, 1950년 6·25전쟁 때 폭격으로 누각이 소실되었다가, 1978년 문루는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화서문(華西門)..

 

 

 

 

 

화서문(華西門)은 보물 제304호..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화서문 앞에 있는 별난 육개장 순대국밥집을 찾았는데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많았고 괜찮았다.

 

 

 

 

 

 

 

 

 

 

 

 

 

 

 

그늘진 곳에는 잔설과 얼어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화성장대)와 서노대..

 

 

서장대(화성장대)에서 바라본 광교산 백운산 관악산..

 

 

광교산 시루봉..

 

 

백운산..

 

 

관악산..

 

 

서노대(西弩臺)는 성 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게 지은 시설..

 

 

 

 

 

서장대(西將臺)는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영 외영(壯勇營 外營) 군사들을 지회했던 지휘소로

편액에는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 쓰여 있다.

 

 

 

장용영 외영(壯勇營 外營)은 정조의 친위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편액에 있는 화성장대(華城將臺) 글씨는 정조가 친해 썼다.

 

 

서장대(화성장대)에서 바라본 화성행궁과 북수동성당..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리산..

 

 

수리산 슬기봉..

 

 

 

 

 

 

 

 

 

 

 

 

 

 

3.1독립운동기념탑..

 

 

서남암문 앞에서 팔달문으로~

 

 

 

 

 

 

 

 

 

 

 

 

 

 

팔달문 앞에서 바라본 팔달산과 수원화성..

 

 

수원화성(水原華城) 팔달문(八達門)..

 

 

팔달문(八達門)은 보물 제402호이며 수원화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남문..

 

 

팔달문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화성행궁..

 

 

하마비(下馬碑)는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비석..

 

 

 

화성행궁(華城行宮)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고,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 조선 세종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 바로 화성행궁이라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1790년에서 1795년(정조 14∼19년)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뽑히는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다.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3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신풍루(新豊樓)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봉수당(奉壽堂)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한다. 1795년(정조 19)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 진찬례를 이 건물에서 거행하였다.

 

이 때 정조(正祖)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曺允亨)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하였다.

 

 

 

 

 

 

 

 

 

 

 

 

1776년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으로 높이는 한편,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도 진종(眞宗)대왕으로 추숭하고, 효장묘도 영릉(永陵)으로 격을 높였다. 또한 생부인 사도세자 존호도 장헌세자로 높이고, 묘소도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고 경모궁(慶慕宮)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렸다. 정조(正祖)는 조선 후기 개혁과 대통합을 실현한 군주로서 갖가지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고 르네상스 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재위기간에 추진했던 각종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뒤주는 곡식 등을 담아 보관하는 생활 용기..

 

 

정조(正祖)는 1762년 생부 사도세자(후일의 장헌세자, 고종때 장조로 추존됨)가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여정을 거쳤다. 생부가 뒤주에 갇혀 죽던 1762년은 정조의 나이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힌 생부를 살려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던 어린 정조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화성행궁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서 맞은 편에 있는 북수동성당 수원순교성지로~

 

 

북수동성당(北水洞聖堂)은 천주교 수원교구에 소속되어 있는 성당으로 1890년 왕림성당(1888년 설립,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왕림리)의 공소(수원공소)로 출발하였으며, 1923년 11월 23일 본당으로 독립하였다. 설립 당시 성당명은 수원성당이었고, 신자수는 76명이었으며, 초대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였던 르 메르(한국이름 이유사, 세례명 루도비코) 신부였다. 1959년 11월 고등동성당이 분리되어 나가면서 수원성당에서 북수원성당으로 개칭되었다.

 

 

 

 

 

 

 

 

 

 

 

 

 

 

 

 

 

천주교 박해기간 때 수원에서의 박해는 특히 혹독했는데 수원성지(수원화성)의 중심에 위치한 북수동성당 일대는 순교자들의 형이 집행되었던 토포청(중영)과 심문을 하던 이아(화청관)이 있던 자리였다. 2000년 9월 20일 수원교구는 북수원성당과 그 일대를 순교성지로 선포했다.

 

 

 

 

 

 

 

 

5개 초를 봉헌하고 기도와 묵상을 하였는데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소화초등학교(小花初等學校)..

 

 

 

 

 

 

 

 

팔달문과 북수동성당 사이에 있는 여민각(與民閣)은 정조대왕의 실학과 효를 계승하고자 건립한 누각..

 

 

 

 

 

팔달문시장과 지동시장은 팔달문 앞에 있는데 북수동성당 수원성지와 10여분 거리에 있다.

 

 

팔달문시장과 지동시장에서 한잔하고 싶었지만 먹을만한 음식점이 안 보여서

팔달문 앞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역으로 이동해서 무궁화열차를 타고 귀경~

 

 

 

부부 / 정낙추

 

온종일 별말 없이

풀 뽑는 손만 바쁘다

 

싸운 사람들 같아도

쉴 참엔 나란히 밭둑에 앉아

막걸릿잔을 건네는 수줍은 아내에게

남편은 멋쩍게 안주를 집어준다

 

평생 사랑한다는 말 하지 않고도

자식 낳고 곡식을 키웠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 농사를 지으며

사랑받지 않고 크는 생명 어디 있으랴

 

한세월을 살고도

부끄러움 묻어나는 얼굴들

노을보다 붉다

 

그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던 수원화성 화성행궁 북수동성당 수원성지를

마눌님과 함께 찾았는데 주위 산경이 아름답게 다가왔고

역사 공부하는 느낌과 기도와 묵상을 하였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