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좌진장군 생가지(金佐鎭 將軍 生家址)는 충청남도 홍성군 길산면
행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야 김좌진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김좌진장군 묘와 생가지를 10년 전 2016년 10월 오서산 산행을 마치고
찾아보고 싶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찾기 쉽지 않아서 포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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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선생 생가지
김좌진장군 생가지
홍주읍성 홍주성지성당 안회당

김좌진장군 생가지와 백야기념관..

김좌진장군 생가부터 찾아보고 나서 백야기념관으로..

김좌진장군 생가-백야기념관-김좌진장군 사당으로~

백야 김좌진장군 생가..

김좌진장군(金佐鎭 將軍) 생가(生家) 주련(柱聯)..
家奴解放民族春(가노해방민족춘) / 집안의 노비들이 해방되니 민족에게 봄이 왔다
靑山大捷光復身(청산대첩광복신) / 청산대첩으로 몸을 광복하다



刀頭風動關山月(도두풍동관산월) /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
劍末霜寒故國心(검말상한고국심) / 칼 끝에 찬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구누나
三千槿域倭何事(삼천근역왜하사) /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왠말인가
不斷腥塵一掃尋(부단성진일소심) / 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壬申 立夏 語錄(임신 입하 어록) / 임시년 여름이 시작될 때 남긴 기록
白冶將軍 詩(백야장군 시) / 백야 김좌진 장군의 시
斷腸之痛一首(단장지통일수) / 머리부터 창자가 끝어질 듯 한 통증
如初 居士(여초 거사) / 여초 김응현(金膺顯)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 1927~2007) 글씨를 8년 전 2018년 1월 경상북도 김천시에
위치한 황악산(黃岳山) 산행을 하기 위해 직지사(直指寺)를 찾았을 때 산문(山門)에 걸린
현판(懸板)에서 보았는데 앞에는 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
뒤에는 覺城林泉高致(각성임천고치)라고 쓰여 있었다.



白冶 紀念館(백야 기념관)..







홍주성 전투(洪州城 戰鬪)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안병찬을 중심으로 한 홍주지역 인사들은 의병봉기를 결의하고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여 1906년 3월부터 대대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해 9월 15일에는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하고 13일간 항전하였으나
일본군의 계속되는 증파병력에 의해 많은 희생을 치루고 실패하고 말았다.





청산리 전투(靑山里 戰鬪)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등이 연합하여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독립군 토벌을 위하여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일대에서
10여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이다.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명을 내었다.
일제는 청산리 전투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은 만주에 사는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청산리 대첩은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청일 전쟁 패배 이후 자신감을 잃었던 중국은 청산리 대첩을 보고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다시 불사를 수 있었다.

백야 김좌진장군, 백범 김구선생 모두 동족에 의해서 쓰러졌는데
이념 이데올로기는 무섭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和龍門(화룡문)..

臥龍齋(와룡재)는 제사를 지내는 재실(齋室)..

靑山門(청산문)..

白冶祠(백야사)..
김좌진장군의 호(號) 白冶(백야)는 밝은 대장장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이 강하게 단련되어야 한다고 백야라 하였다.

김좌진(金佐鎭 : 1889.11.24~1930.1.24)은 충청남도 홍주군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1889년 11월 24일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1904년 뜻한 바 있어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를 집안에 남아 있는
노복들에게 나누어주고 상경하였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에 임관되었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하자,
독립군 무장 항쟁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시작하였다.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서울에서 붙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 생활 중 백범 김구(金九)와의 만남은 항일 투쟁을 위한
새로운 인연으로 작용하였다.
1913년 출감 후 고향에서 정양을 취하던 중 박상진(朴尙鎭), 채기중(蔡基中) 등이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창설하자 이후 만주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김좌진은 독립군 단체를 찾아다니며 서로 힘을 모을 것을 요구했다.
마침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독립군을 ‘서로 군정서’와
‘북로 군정서’로 통합하여 재편성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김좌진은 북로 군정서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10월, 김좌진은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청산리에서 겨우 수천 명의 독립군으로 수만 명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독립군은 100명이 채 못 되게 목숨을 잃은 반면
일본군은 3,300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김좌진은 공산당이 된 옛 부하의 총을 맞고
41세의 나이에 목숨을 거두었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김좌진장군 생가지를 나와서 홍주읍성으로~

山營月下磨刀客(산영월하마도객) / 산 위의 병영 달빛 아래 칼 가는 나그네
鐵寨風前秣馬人(철채풍전말마인) / 철책성벽 바람 부는 앞에 말 먹이는 병사
旌旗蔽日連千里(정기폐일연천리) / 깃발은 해를 가려 천리에 뻗어있고
鼓角掀天動四隣(고각흔천동사린) / 고각소리 하늘을 들먹이고 사방 이웃을 뒤흔들도다.
十載臥薪嘗膽志(십재와신상담지) / 십 년 동안 섶에 누워 쓴 쓸개를 맛본 뜻은
東浮玄海掃腥塵(동부현해소성진) / 동쪽에 떠 있는 현해탄의 저 티끌을 모두 쓸어버리겠다 함이니라.
김좌진 장군이 1920년 5월 북로군정서 사령관일 때
사관생도 입소식을 마치고 지은 한시..
같은 민족인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쓰러진 백야 좌진장군 생가지
(白冶 金佐鎭 將軍 生家址)를 마눌님과 함께 찾았는데
이념 이데올리기는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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