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용운선생 생가지(韓龍雲先生 生家址)는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인,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한용운선생 생가지(韓龍雲先生 生家址) 입구 우측에 만해 문학 체험관이 있는데
한용운선생 생가지와 만해사(卍海祠)를 먼저 찾았다.

●충청남도 홍성군 여행 코스(202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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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선생 생가지
김좌진장군 생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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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선생 생가지(韓龍雲先生 生家址)..

한용운선생 생가(韓龍雲先生 生家)는 초가지붕을 얹었으며
방 두 칸, 부엌 한 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구조로
한용운이란 문패가 걸려있다.
댓돌이며 툇마루가 한없이 정겹고 우물과 장독대를 돌아
집 뒤 야산 언덕배기를 올려보면 적송과 조릿대가 자란다.
부엌 옆은 장작을 쌓아두는 헛간이고
사랑방 옆은 절구통과 맷돌이 보관된 헛간이다.
생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라는 사당이 있다.

한용운선생 생가지(韓龍雲先生 生家址)는
1989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轉大法輪(전대법륜)은 법의 바퀴가 크게 굴러간다는 뜻으로
진리의 변화를 설명한 글..


萬海 韓龍雲 大禪師 謹頌(만해 한용운 대선사 근송) / 만해 한용운 대선사를 삼가 칭송함
志操不變如松竹(지조불변여송죽) / 지조가 변치 않음이 소나무와 대나무 같고
民族精氣如金石(민족정기여금석) / 민족의 정기는 솨와 돌처럼 단단하도다
修道慈悲處一世(수도자비처일세) / 일평생 자비로운 마음으로 도를 닦으셨고
爲國愛民不顧身(위국애민불고신) /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여 몸을 돌도지 않으셨네
不受配給自滅盡(불수배급자멸진) / (일제의) 배급을 거부하며 스스로 스러져 가셨으나
敢願在天尊魂靈(감원재천존혼령) / 감히 원하건대 하늘에 계신 존엄한 혼령이시여
祖國統一遂繁榮(조국통일수번영) /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이루게 하소서
己未 三月 下澣 後學 星藏 韓甲東 謹書(기미 삼월 하한 후학 한갑동 근서)
/ 기미년 삼월 하순에 후학 성장 한갑동이 삼가 씀


만해사(卍海祠) 외삼문(外三門)..

만해사(卍海祠) 외삼문(外三門) 현판(懸板) 글씨는 禁門(금문)..
간자체로 쓰인 만해사 외삼문 현판 글씨가 茶門(다문), 紫門(자문),
桑門(상문) 것 같아서 고민을 했는데 간자체는 어렵다.

만해사(卍海祠)..
불교의 만자(卍)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卐)는 생김새가 매우 비슷하지만
그 기원과 의미는 전혀 다르다.
불교의 만자(卍)는 부처가 지닌 성덕과 길상을 상징하는 불교기호 표시..
나치의 하켄크로이츠(卐)는 독일어로 '갈고리'를 뜻하는 '하켄(Haken)'에
'십자가'를 뜻하는 '크로이츠(Kreuz)'가 합쳐진 조어이며
나치 독일이 사용한 상징 문양이다.
원래는 고대 게르만족 등에서 행운의 부적으로 쓰이던 문양이었으나,
1920년대 초 히틀러가 이를 변형해 정치적 상징으로 채택하면서
의미가 크게 달라졌고 ‘아리아 인종의 순수성과 힘’ 같은 의미로 상징화했다.
현재의 독일에서 하켄크로이츠(卐)를 묘사하거나 연상하게 하는 것을
반입하거나 제작 시,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한용운(韓龍雲, 1879.8.29~1944.6.29)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법명(法名)은 용운(龍雲),
법호(法號)는 만해(萬海)이다.
26세에 강원도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여 불교의 기초지식을 배웠지만,
문명세계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세계일주를 단행하였다.
세계일주를 시베리아에서 중단한 한용운은 설악산 백담사로 돌아왔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蓮谷)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1944년 64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했다.

만해 문학 체험관..




南國寒花早未開(남국한화조미개) / 남쪽 나라 차가운 꽃은 아직 피지 않았고
江湖蕩燏入枯菑(강호탕율입고치) / 강과 호수의 물은 마른 밭으로 흘러드네
鴈影山河人似夢(안영산하인사몽) / 기러기 그림자 비치는 산하와 인간사는 꿈만 같은데
無邊秋樹月初來(무변추수월초래) / 끝없는 가을 나무 사이로 달이 막 떠오르누나
※만해 한용운 선생께서 당나라 시인 한악(韓偓)의 시 남국(南國)을 쓴 것...
兩龍窮思杳(양룡궁사묘) / 두 언덕이 하득하여 희미하니
稀此人自賞(희차인자상) / 그윽한 사람의 마음을 바라보며
未輕歸院裡(미경귀원리) / 쉽게 돌아오지 못하나니
微風日欲煮(미풍일욕자) / 절 속에 미풍은 불고 해가 타는 듯 한데
秋香無數搏禪衣(추향무수박선의) / 가을 향기 무수히 선의(가사)를 때리누나
※만해 한용운 선생께서 옥중에서 쓴 추야(秋夜)..
마저절위(磨杵絶葦) /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친필 글씨를 새긴 서각 작품..


심우장(尋牛莊)은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해 한용운 선생이 부인 유원숙과 딸 한영숙과 함께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곳..
승려 벽산(碧山)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고 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심우장(尋牛莊)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용운은 20살이 되던 해인 1898년 2월 10일 전정숙과 결혼하였다.
1904년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얻었으나
그는 이미 강원도 백담사에서 출가를 하였다.
후일 아들 한보국이 부친인 한용운을 만나러 왔을 때
그는 외면하였다고 한다.
장남 한보국은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가
6.25 전쟁 때 월북했다.
한보국은 북한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며 그럭저럭 대우를 잘 받았고,
1976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31년 53세의 나이에 재혼에 뜻이 있어 동지들의 소개로
13살 연하의 유숙원(1892년~1965년)과 재혼하였고 딸 한영숙을 두었다.
유숙원은 결혼하기 전까지 단성사 옆에 위치했던 진성당병원의 간호사였다.
유숙원은 만해 한용운과 혼인 후 호적에 올리지 않았으며,
딸 한영숙은 아예 호적조차 없었다.
그는 왜놈이 통치하는 나라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호적을 만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배급도 받지 못했으며 딸은 학교에 진학할 수도 없었다.
결국 딸 한영숙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집에서 직접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둘째이자 장녀인 한영숙은 아버지의 기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심우장을 지켰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교우관계에 있어서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뜻을 함께한 동지들에 대해서는 매우 깊은 의리를 보여 주었다.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던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이
1937년 3월 옥중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으로 모시고 와
5일장을 치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변절한 친일인사에 대해서는 설령 친분이 깊거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더라도 단호히 절교하고 일체 상대하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崔麟)이 변절한 뒤
심우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으나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그 후 혼자 방문한 최린이 한용운이 부재중이자
딸에게 돈을 쥐어주고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한용운은 부인과 딸에게 호통을 치고,
바로 명륜동 최린의 집으로 달려가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되돌아 왔다고 한다.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한용운선행 생가지를 나와서 김좌진장군 생가지로~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그동안 마음에 두었던 한용운선생 생가지(韓龍雲先生 生家址)를
마눌님과 함께 찾았는데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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