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미바다열차와 함께한 박물관 여행(2025.12.12)국립인천해양박물관

들산바람 2025. 12. 20. 14:28

월미바다열차를 타고 국립인천해양박물관, 한국이민사박물관, 월미전망대,

월미산 정상을 마눌님과 함께 찾았는데 인천역 1번출입구를 나와서

맞은편에 있는 차이나타운에서 점심을 먹고 여행을 시작했다.

www.wolmiseatrain.or.kr/

 

월미바다열차와 함께한 여행 코스..

 

박물관역-국립인천해양박물관-박물관역-월미공원 한국이민사박물관-

석양정-월미전망대-정상광장-예포대-정상광장-월미산 정상-

정상광장-돈대삼거리-박물관역

 

월미바다열차를 타고 박물관역에 내려서 여행을 시작했는데

어느 정류장에 내리더라도 1번 다시 탈 수 있다.

 

 

인천 제8부두 출입문..

 

인천 제8부두와 월미산..

 

인천항 7부두 내 사일로(Silo·곡식저장시설) 외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 벽화는 아파트 22층 높이인 48m, 길이 168m, 폭 31.5m 규모로

'세계에서 가장 큰 야외벽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월미공원역..

 

 

월미문화의 거리역..

 

월미도선착장과 인천대교..

 

월미문화의 거리와 월미산..

 

월미도선착장..

 

국립인천해양박물관과 인천대교..

 

인천대교(仁川大橋)는 송도국제도시와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다리로,

2005년 7월 착공돼 4년 4개월 만인 2009년 10월 16일 개통됐다.

인천대교의 주탑 간의 거리(800m)는 국내 최장이자 세계 5위이며,

교량의 전체 길이(21.38km)는 세계 7위 규모다.

 

국립인천해양박물관과 인천상륙작전상륙지점(녹색해안)에 세워진 조형물..

 

 

인천국립해양박물관..

 

박물관역 좌측은 월미공원. 한국이민사박물관, 월미전망대, 월미산 정상..

박물관역 우측은 국립인천해양박물관..

 

박물관역에 내려서 우측에 있는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을 찾아보고

맞은편에 있는 월미산공원 한국이민사박물관, 월미전망대,

월미산 정상으로 진행했는데 1번 다시 탈 수 있다.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은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양문화시설로 2024년 12월 11일에 개관했다.

‘바다를 만나다, 미래를 마주하다’라는 주제로 개관식이 진행되었으며,

주요 시설로는 어린이박물관, 디지털 실감 영상실, 해양교류사실,

해운항만실, 해양문화실, 기획전시실 등이 있다.

‘교류의 바다 연결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의

해양 교류 역사와 해운·항만의 발전, 해양 관련 문화 예술을 전시하고 있고

특히 실감영상실에서는 조선 시대 해양 항해를 재현한

‘항해조천도’를 감상할 수 있다.

 

 

www.inmm.or.kr/

 

 

 

 

 

 

 

 

 

 

 

 

 

 

 

 

'봉급'을 뜻하는 영어인 샐러리(Salary)는 '소금을 지급한다'는 뜻의

라틴어인 살라리움(Salarium)에서 비롯되었다.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은 조선후기 우이도의 홍어상인.

1801년 류큐(오키나와)에 표류하여 필리핀, 마카오,

중국을 거쳐 3년 2개월 동안 각국의 문물을 접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상인으로서는 드물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인물..

 

1801년 12월 문순득은 대흑산도 남쪽에 있는 태사도에 홍어를 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유구국(琉球, 류쿠, 지금의 오키나와 )까지 표류하였다.

그곳에서 약 8개월간 머문 뒤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오려 배를 탔는데

또다시 풍랑을 만나 유구국보다 더 남쪽인 여송(呂宋, 지금의 필리핀 )에 표류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머물다 다시 중국으로 가는 상선을 타고

광둥성 오문(廣東省 澳門, 지금의 마카오 )에 도착했다.

광둥성 오문에서 3개월간 머물다가 난징, 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흑산도에 유배 와 있던 정약전 이 1805년부터 1816년까지 문순득을 인터뷰하고

그의 체험담을 날짜별로 기록하여 <표해시말(漂海始末)>을 펴냈다.

이 책에는 문순득의 표류일정과 함께 유구, 여송, 마카오의 풍습, 언어,

의복, 선박, 토산품, 기후 등이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우리나라 개벽 이래 해외의 오랑캐 나라를 최초로 보고

돌아왔다는 뜻에서 천초(天初)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

정약전은 문순득의 표류담에 대한 내용을 편지로 써

문순득에게 들려 동생인 정약용이 유배 중이던 강진으로 보냈다.

편지를 전해 받은 정약용은 문순득이 마카오에서 보고 온 화폐제도를 참고하여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화폐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여송까지 표류했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뜻으로

문순득의 아들 이름을 여환(呂還)이라고 지어주기도 했다.

1818년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는 우의도로 문순득을 찾아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선박에 관한 논문인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썼다.

이강회는 정약전의 <표해시말>과 자신이 쓴 운곡선설,

거설답객난(車說答客難), 제거설(諸車說)을 한데 묶어

유암총서(柳菴叢書)를 완성하였다.

 

한편, 1801년(순조 1년) 제주도에 표류한 배에 5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 길이 없자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들을 청나라 표류민들과 함께 중국으로 송환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관원도 그들의 국적을 알 수 없다며 다시 조선으로 송환했다.

이들은 제주도에 9년 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문순득이 표류 당시의 경험을 살려

이들이 여송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통역한 끝에

1809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대건(金大建. 1821.8.21~1846.9.16)은 1846년 병오박해 때

서울 새남터에서 처형된 신부로 한국인 최초의 사제이다.

1821년, 충청남도 당진시에서 태어나 1836년, 중국 마카오에서 유학한 뒤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로부터 2주일 뒤인 8월 31일 상해를 출발하여 제주에 표착했다가

10월 12일 충청도 강경을 통해 귀국했으며,

11월부터 서울과 경기도 용인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846년 5월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상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황해도로 갔다가 체포된 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천주교 세례명은 안드레아,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아명은 재복(再福)이다.

대건은 관명으로 추정된다.

1821년 8월, 충청남도 당진시 솔뫼(현, 우강면 송산리)에서

아버지 김제준(金濟俊)과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김진후(金震厚)가 오랫동안의 옥고 끝에 1814년에 순교하고,

종조할아버지 김종한(金宗漢)이 1815년에 순교한 뒤,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과 부모를 따라 서울특별시 청파로 이주했다가

용인시 굴암(현, 이동면 묵리)으로 다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최양업(崔良業)은 조선 후기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로

11년 6개월 동안 사목 활동을 한 신부이다.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부터 1842년까지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842년 마카오를 떠나 북만주 소팔가자에 머물렀고,

1844년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았다.

1846년부터 몇 차례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고,

1849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그해 12월 조선에 입국했다.

수년간 광범위한 지역의 사목을 도맡아 하며 순교자 행적 조사,

교리서와 기도서 번역에 힘쓰다 1861년 6월에 사망했다.

 

표류인 문순득 일기..

 

 

작약도 맞은편은 구읍뱃터..

 

14년 전 2011년 8월 마눌님과 함께 백운산 산행을 마치고

구읍뱃터에서 카페리호를 타고 월미도로 이동했었고

5년 전 2020년 9월에도 백운산 산행을 마치고

월미도로 가기 위해서 구읍뱃터를 찾았는데

세월 한번 참 빠르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남천은 쌍떡잎식물 이판화과 미나리아재비목 매자나무과의 상록관목으로

남천촉(南天燭), 남천죽(南天竹)이라고도 하며 높이 3m 정도 자란다.

잎은 딱딱하고 톱니가 없으며 3회 깃꼴겹잎이다.

또한 옆축에 마디가 있고 길이 30~50cm이다.

작은 잎은 대가 없고 타원형의 바소꼴이며 끝이 뾰족하다.

6~7월에 흰색의 양성화가 양성화가 가지 끝에 원추꽃차례로 달린다.

열매는 둥글고 10월에 빨갛게 익기 때문에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다.

 

약용과 관상용 식물이지만, 일반 식용이나 임의 복용은 위험하고

어린아이가 있는 곳에는 두지 않아야 한다.

 

남천 열매에는 소량의 시안배당체(청산가리 성분) 등 독성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과다 섭취 시 구토, 어지러움, 위장 불편감, 설사, 두근거림 등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잎을 생으로 피부에 장시간 접촉하면 자극감이나 붉어짐이 생길 수 있고

알레르기 체질, 임산부, 수유부, 소아, 심장·간 질환자는

섭취나 접촉을 피해야 한다.

 

남천 꽃말은 전화위복~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을 나와 서해 바닷바람을 쐬고 나서

맞은편 월미산 아래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으로~

 

길 / 정정근

 

길에서는 언제나 바람을 만나지

풍경은 자꾸 바뀌어 가고

발걸음은 앞으로 가는 듯 뒤를 돌아봐

내 가는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면서 조금씩 늙어갈 뿐이지만

멈출 수도 없지

계절도 내 인생도 그대로 있지 않으니

발자국 속에 이야기를 남기며

끝 모를 길을 걸어가네

 

마눌님과 함께 월미바다열차를 타고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을 찾았는데

우리나라가 해양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고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