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산 설화산(2014.6.25)4년 전 광덕산에서 부용묘를 가르키는 이정표를 보고~

들산바람 2014. 7. 2. 10:15

 

산행도 산행이지만 4년 전 광덕산에서 장군바위 조금 지난 갈림길에서 

운초 김부용묘를 가르키는 이정표를 보았는데 너무 궁금해서 다시 광덕산을 찾기로~

​광덕사행 600번버스 정류장은 천안역 1번출구 중앙시장 방향으로 나와서

우측 바게트베이커리빵집 앞에..

 

 

바게트베이커리빵집 앞 정류장에는 매 정시 전후 또는 30분 전후에 도착..

 

 

약 50분 후 10시 27분에 광덕사 종점에 도착..

 

 

 

 

광덕사로~

 

 

운초 김부용묘는 광덕사 조금 못미쳐 우측 다리를 건너서~

 

 

천불전을 지나 운초(雲楚) 김부용(金芙蓉)묘를 들렸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광덕사로~

 

 

김부용(金芙蓉)은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명기..

 

 

김부용(1820~1869)은 평안남도 성천군 삼덕면 대동리 현봉에서 태어났는데 운초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집안이었고 부친은 추당이라는 호를 가졌으나 가난하여 아전직도 하였고

작은 아버지 일화당과 형제간의 우의도 깊었고 시와 문예에 능했다.

 

부친 추당을 기리며

 

매미울고 나니 비개고 가을인데,
      뜰에는 신선한 바람  나뭇잎은 성글다.
      간간이 풍경소리 들려 산 기운은 맑고,
      아전에서 물러난 집 버들그늘 한산하다.
      석류는 밤비 맞고 가늘게 터지는데,
      능덩쿨 밑 서가에선 천권장서 펄럭인다.

 

 

사절정(四絶亭)  

 

亭名四絶却然疑(정자이름이 어이하여 사절인가)

四絶非宜五絶宜(사절보다 오절이 마땅할것을)

山風水月相隨處(산과 바람 물과 달이 어울린데다)

更有嘉人絶世奇(절세가인이 더 했으니 오절이라네)

 

 

春風忽태蕩 (춘풍홀태탕) 봄바람은 화창하게 불어오는데

山日又黃昏 (산일우황혼) 서산에는 또하루 해가 저문다

亦如終不至 (역여종부지) 기다리는 님 소식은 끝내없어도

      猶自惜關門 (유자석관문) 그래도 아쉬움에 문을 못닫네 

 

垂楊深處依開窓 (수양심처의개창) 수양버들 늘어진 창을 열고 기대서니

小院無人長綠苔 (소원무인장녹태) 님없는 뜰엔 푸른 이끼만 길게 자라고

簾外時聞風自起 (렴외시문풍자기) 주렴 밖에 가끔 바람이 절로 일어서   

  機回錯認故人來 (기회착인고인래) 님이 오시나 속은 것이 몇번 이던고

 

 

부용당

 

연꽃 연잎은 붉은 난간 뒤엎고

단청고운 정자에 놀이 배 떠있네.

펄펄뛰는 고기는 연못이 놀이마당

때대로 연잎위로 솟구쳐 오른다네.

새벽의 부용당은 간밤 비에 훔 벅 젖고

비개인 높은 집엔 제비가 엇갈려 날고

맑디맑은 이슬방울 구술 인냥 천만 알이

산들바람 불때마다 유리알로 떨어 지네.

맑은 노래 한곡 불러 하늘가에 닿는 듯

열 두난간 붉어있고 달빛은 출렁인다.

운모병풍 펴져있는 은촛대 아래에선

미인이 사쁜사쁜 연꽃인냥 나타나네.

 

 

운초 김부용은 4살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6살 때 일찍 부친을 여의고 작은아버지 일화당의 집에서 글을 배우며 자랐는데 10살 때 사서삼경. 제자백가 등을 읽었고 12살에 기적에 올랐고 15살에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했다고 한다..

운초 김부용은 글을 겨우 알정도 어린 나이에 작은아버지

일화당 은공을 못잊어 애도하며 쓴 시도 있다..

  

우리 집은 본디 유가 집안이요. 대대로 향리에 살았는데, 선친이 만년에 가난하니 군청의 아전일 맡아 근면봉사 하였다오. 성품 곧아 윗사람을 못 속이고, 무리에 어울려도 제 마음 비웠었네, 집안을 보살펴도 윤리 신의 도타우며, 제몸을 단속하되 경전이치 중하셨소. 서경풍속 화려하며 사치에 기울었고, 곳곳마다 비단옷 차장하였네. 노래와 방탕이 유행하였고, 술 먹고 노름하기 가무 뿐이네. 사치한 옷차림에 검은 옷 없어지고, 여인절개 처음은 방정했으나, 후처바람 유행되어 아녀자 난리 나고, 귀문자제 책 읽는 일 게을리 했었다오. 법도는 세속을 따르면서 풀어지고, 선비군자 부끄러움 몰랐었다오. 개와 고양이 짝지어 새끼 낳고, 좋은 세상 그 징조 원근에 사라졌소. 중부께서 어려운 아우 되시어, 학문은 천하에서 뛰어 나셨고, 형제간 우애하고 화순하시며, 서로의지 서로도와 화목하셨소. 그래서 일화당이라  이름 했으니, 그 뜻이 당호라도 빛 나셨다오. 그러나 삼십년간 병을 안고, 삼십년간 공부하며 책을 읽었오. 방랑하며 유불도 삼교를 공부했고, 자유분방 백가서도 두루었오. 외가서의 방술도 섭렵하면서, 근본이치 궁구치 않음이 없었소. 성천고을 고문서를 모두 뒤졌고, 양웅의 문장에도 박통하셔서, 그를 닮아 시문도 지어내셨고, 차분하게 문장기풍 넓히셨다오. 모르는 세상사람 부적공부 한다 하고, 잘 아는 이웃사람 병고치는 방책 이랬소. 풍류시문 잘하셔서 칭찬 들었고, 책 향운이 서가에 가득 풍겼소. 세모에 연천공이 손수 뵙고서, 처음용광으로 발인 할때에, 오군군수 동문열고 선비 맞는 예 올리고, 초산에다 높은 선비 장사 지냈소. 내 어찌 잠시라도 이시름 없으리오, 불우인생 눈물얹어 이말씀 아룁니다. 내 일찍 어려서 외로운 몸 되고나서, 가엾다 여기시는 아버지로 섬기었오. 아름다운 그모습 뵙자니 슬픔이요, 훌륭하신 그 교훈 항상 몸에 사무치오. 내처음에 탁문군 설교서 재주 없었소. 겨우 어자 노자 구별할 따름인데, 어려서 시인으로 시중에 이름남은, 공께서 내린 은혜 아님이 없답니다. 중부님 가시고서 남긴 책 안고, 울며 후세에 전하면서 그 평가 기다리오.

 

 

운초 김부용(金芙蓉)이 연천 김이양 대감에게 거두어주길 부탁하자 50년 가까이 나는 나이 차이 때문에 난색을 표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면서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도 있고 팔십객 청춘도 있다고 하였다..

김부용30세 전후에 77세 연천 김이양을 만나서 50여년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실로 들어가서

김이양이 9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5년을 함께 살았다..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은 (1755∼1845, 영조 31∼헌종 11) 천안 광덕에서 태어나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命汝)이고 한성부윤 4회 역임, 함경도 관찰사, 호조, 병조, 이조판서 역임을 하였다..

 

 김이양의 할아버지는 시술(時述)이고 아버지는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헌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윤지술(尹志述)의 딸이고 김이양의 부인은 이명상의 딸인 완산(完山) 이씨인데 아들이 없어 김이양의

동생 이고(履枯 )의 아들인 한순(漢淳)을 양자로 들였다. 한순은 대근과 현근의 두 아들을 두었고,

현근은 순조의 딸인 명온공주(明溫公主)와 혼인해 동녕위에 봉해졌다고 김이 양문집에 전해져온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세도가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 무덤은 비석도 없어졌고 

최근에 운초 부용 추모제를 계기로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權力無常(권력무상)함을 보는 것 같기도.. 

life is short, Art is long~

 

 

김부용(金芙蓉)은 사후에 광덕사 뒤에 있는 김이양묘 가까이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김부용묘는 작년만해도 잡초가 무성하고 돌보는 사람도 없고

무연고묘 같았는데 올봄 천안문화원 주체로 봉분을 돌로 감싸고 잔디도 심었..

 

김부용묘가 천안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천안 시민들은 큰 자랑인데

그 가치(?)를 잘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운초(雲楚) 김부용(1820~1869)은 49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주옥같은 한시 350수를 남겼다.

 

 

勝妾容(승첩용) 내가 더 예쁘지

 

容花發滿池紅(부용화발만지홍) 연꽃이 가득피여 물 가득히 붉고나

人道芙蓉勝妾蓉(인도부용승첩용) 사람들은 연꽃이 나보다 곱다하네

今日偶從堤上過(금일우종제상과) 오늘 우연히 둑위를 거니는데

如何人不看芙蓉(여하인부간부용) 어찌하여 사람들은 꽃은 안보고 나만 보는가

 

 

琴歌詩酒書(거문고 노래 시 술 그림이 있으니)

人世亦蓬萊(이승이 또한 신선세상이라)

江山如有待(강산도 기다리면 있을 터이니)

花鳥莫相猜(꽃도 새도 서로 시새우지 말아라) 

 

 

부영묘에서 계속 진행하면 장군바위인데 광덕사와 새로 세운 광덕산 정상석도 보고싶어

광덕사로 다시 되돌아가면서 바라본 설화산과 광덕산..

 

 

광덕산 등로는 극락교 좌측으로~

 

 

호두나무 수령이 400년이 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충렬왕 1920년 9월에 영밀고 유청신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님의 수레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도나무의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지고 와서

어린 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유청신 선생 고향집 뜰 앞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광덕사가 호도나무를 처음으로 심은 시배지~

 

 

광덕사는 천안시 광덕면 광덕산 남쪽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인데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서 새로 증축하였다..

일본놈들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똑 같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이웃..

 

 

 

 

 

 

전에 없었던 566개 계단이 새로 생겼다..

에..효....

 

 

 

 

 

 

 

 

 

 

4년 전에는 음식을 파는 장사꾼들로 난장판 같았는데 정상석도 새로 세워졌고 깨끗해 보였다~

천안의 진산인데 이정도는 돼야지~ㅎ

 

 

광덕산은 충청남도 아산신 배방읍 송악면과 천안시 남동구 광덕면 광덕리에 위치한 높이 699.3m 산..

광덕산 하면은 천안인줄 알았는데 생각이 잘못됐다~ㅎ

 

 

구 정상석..

 

 

 

 

 

 

진행하여야할 설화산이 흐리고 연무 때문에 뿌옇다..

 

 

 

 

4년 전에 찾았던 곳이라서 등로가 눈에 익숙~

맘 편한 산행~

 

 

 

 

장군바위..

 

 

 

 

 

4년 전 광덕산에서 배방산 종주산행을 할 때 부영묘 이정표를 보았는데 

찾아보고 싶은 생각에 몸살이 날 지경~

 

 

 

 

 

 

 

 

나리꽃의 꽃말은 깨끗한 마음, 순결, 존엄~

 

 

설화산과 망경산 갈림길 망경산삼거리~

 

 

설화산으로~

 

 

 

 

절골임도..

 

 

 

 

남방식 고인돌 같기도~ㅎ

 

 

 

 

 

 

 

 

 

 

또 다른 남방식 고인돌~

 

 

 

 

 

 

우측은 망경산, 아래는 넙티고개, 좌측은 태화산인데 태화산 들머리에 있는 백련사에 계시는 스님 생각이 났다..

4년 전 광덕산에서 배방산 종주 산행을 할 때 식수 때문에 백련사에 들렸는데 들바람이 지쳐 보였는지

쉬었다가라고 하시고 음식도 먹고가라고 하시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도 가져다 주시고

꽁꽁언 아이스께끼도 주셨는데 아이스께끼를 빨아먹으면서 산행을 하느라 한참 동안 힘든줄 몰랐다~

스님 그때 너무 고마웠습니다~

 

 

좌측은 배방산, 아래는 카터로, 우측은 태화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

 

 

애기봉..

 

 

 

 

 

 

마루금 뒤 지나온 망경산과 광덕산이 한눈에..

 

 

 

 

작은봉..

 

 

 

 

설화산과 외암리민속마을 갈림길 안부사거리에서 설화산에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외암리저수지 방향으로~

 

 

설화산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되돌아와서 외암리 저수지로~

 

 

 

 

 

 

 

 

배방산..

 

 

설화산(雪華山)이라는 이름은 이른 가을부터 늦은 봄까지 눈이 덮혀 장관을 이룬다 해서..

 

 

외암리 저수지로~

 

 

생각보다 긴 산행..

 

 

 

 

멀리서 광덕산에서 도고산으로 이어진 아산기맥이 뿌옇게 다가온다..한번만하면 아산기맥을 끝낼 수도 있지만..

 

 

 

설화산은 봉우리가 붓끝 같아서 문필봉(文筆峰)이라고도 한다..

설화산 아래서 많은 문필가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설화산은 충청남도 아산시 좌부동과 송악면, 배방읍에 위치한 높이 441m 산..

 

 

송악저수지도 멀리서 보이고 주위 산경이 아름다운데 연무 때문에..

아래는 외암리저수지와 외암리민속마을..

 

 

외암리민속마을..

 

 

 

 

외암리저수지..

 

 

 

 

외암리민속마을에서 강당골을 거쳐서 광덕산으로 진행하는 이정표있다..

 

 

호도나무 시배지 주위라서 그런지 호도나무가 많다..

광덕사로 향하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길 양 옆 나무도 모두 호도나무~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위치한 외암리민속마을은 설화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데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커다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외암마을은 설화산 반대편에 위치한 맹사성(孟思誠) 고택이 있는 중리(中里)마을과

함께 약 500년 전에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애초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다가 조선 명종(明宗)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예안 이씨의

이정(李挺)이 이주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외암마을 참판댁 사량채는 2000년 1월 7일 중 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이정의 6대손이며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간(李柬:1677~1727)이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호를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의 호를 따서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고 불렀으며 巍자가 어려워서 앞 한자만 외암(外巖)으로 바뀌었다.

 

 

 

 

 

 

 

 

 

 

송악(역촌1리)버스정류장은 외암마을매표소를 나와서 우측으로 5분가량 진행하면 농협 앞에~

송악정류장에서 서울 남부터미널, 성남, 온양온천역으로 가는 버스가 정차한다..

 

 

 

 

농협창고(송악 역촌1리)버스정류장에서 남부터미널로 가고 싶었으나 퇴근 시간에는 2시간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교통비도 아낄겸 100번버스를 타고 온양온천전철역으로~

온양온천전철역까지 25분 소요..

 

 

광덕사행 600번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

천안역 앞 바게트베이커리빵집 앞 정류장에서는 매 정시 내지는 30분 전후 도착..

 

 

송약(역촌1리)버스정류장에서 서울 남부터미널까지 2시간 소요..

막차는 18시 20분..

 

 

100번버스는 송악에서 온양온천전철역으로 매시간 20분 간격으로 운행~

외암리민속마을 찾을려면 온양전철역에서 100번버스를 타고 송악(역촌1리)에~

 

 

남부터미널에서 외암리민속마을을 찾을려면 유구 송악행 버스표를 달라고 해야 한다~

당진에도 송악이 있어 그냥 송악표를 달라고 하면

당진 송악표를 준다고 한다..

 

 

들에서 살며 / 김부용

 

   양지바른 언덕에 안개 멀리 보이는 집

버드나무 사립문이 바로 내가 사는 집

밤비에 두 시내는 석자 깊이 물이요

숲 이어진 십리는 거의가 꽃이라네

발 걷고 일어나면 봄 철 해는 높이 솟고

줄 이은 수양버들 양쪽 언덕은 소나무네

들판으로 뻗은 산은 말 달리는 형세 같고

하늘에 널린 구름 용이 노는 기세 같네.

 

4년 전 광덕산에서 부용묘를 가르키는 이정표를 보고 그동안 많이 궁금했었는데 설레임으로 찾았다~

양반집 무남독녀 운초 김부용은 마치 세상 사람들이 잊어주길 바라는 듯

등로 옆 조용한 곳에 잠들어 있었는데

왠지 애잔한 마음이..

 

언제 : 2014년 6월 25

어디 : 광덕사버스종점-천불전-김부용-천불전-광덕사-팔각정-헬리포터-광덕산 정상-장군바위-

마늘봉-만경산삼거리-절골임도-애기봉-작은봉-안부사거리-설화산 정상-

외암저수지-외암리민속마을-역촌1리버스정류장

날씨 : 흐리고 연무와 습도가 높았음

산행 시간 : 10시 27분 ~17시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