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 원효봉 가야산(2013.9.25)수덕사는 덤으로 찾았던 산행~
100대 명산 덕숭산을 찾기 위해 남부터미널에서 탔던 7시 00분 버스는
신창과 삽교와 예산과 덕산을 지나 수덕사에 도착~
덕산을 조금 지나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충의사가..
1968년 창건한 충의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사당..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매헌(梅軒) 윤봉길(1908~1932)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972년 사적 제229호로 지정 받았으며 윤봉길의 유품 28종 56점이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에는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고 1978년 충의문, 홍문 등을 세웠으며 충의사 건물을 중건하였고
1984년 충의관 및 사적비, 2000년 윤봉길의사 어록탑, 2001년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충의사는 면적 14만 7,802㎡로 윤봉길의 영정을 봉안한 본전, 출생 이후 4세 때까지 살던 생가(광현당),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23세 때까지 살던 성장가(저한당)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차창 밖으로 바라본 원효봉과 가야산..
수덕사에 거의 다가왔을 때 차장 밖으로 바라본 덕숭산..
100대 명산치곤 조금 민밋한 것 같기도~
남부터미널에서 5명이 탔는데 신창에서 2명 예산에서 2명 내리고 들바람 홀로 수덕사로..
승객이 없어 하루에 두번밖에 운행을 안하는 것 같다..
금북정맥으로 이어진 마루금 우측에 덕숭산이..
덕숭산은 수덕사 뒤..
수덕사는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수덕사는 드물게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께서 함께 계시는 것 같다..
송춘희씨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 비구니 스님들을 보고 싶었는데 못보았다..
수덕사의 여승 / 송춘희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에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뜨고없는 잊을길없어
법당에 촛불켜고 불러올적에
아~ 수덕사에 새벽이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에 외로운
그림자 속새에 맺은 사랑
잊을 길없어 법당에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새벽이 운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봉정사 극락전(鳳停寺極樂殿, 국보 15))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국보 18)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양 옆에는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3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103)이 있다. 그리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금선대(金仙臺)·
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다.
그밖에 주요 문화재로는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1263),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1381),
수덕사칠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181), 수덕사유물(거문고, 충남문화재자료 192),
수덕사 소장 소조불상좌상(충남문화재자료 384) 등이 있다.
송춘희씨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김일엽(金一葉, 1896~1971)은 남성 중심의 사회와 문학계를 흔들어 놓은
1920년대 신여성 출신의 작가이자 인생의 하반기를 불교에 귀의하여 걸출한 선승(禪僧)이 된 인물..
덕숭산 들머리는 수덕사 좌우 두곳에..
좌측으로~
만공의 본관은 여산,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만공은 법호이다. 속명은 송도암(宋道巖)으로, 1871년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상일리에서 태어났고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서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하였다. 1884년 서산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경허(鏡虛)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아 득도하였다.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수덕사와 정혜사·견성암·간월암 등을 중창하였다.
수덕사와 덕숭산에 관한 전설..
홍주 목사 고을에 수덕이란 도령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양반집 아들로 의젓하게 살고 있는 부자집 아들이었다.
그는 사냥을 좋아해서 어느 해 가을엔 몸종들을 데리고 사냥을 갔었는데 몸종들과 산을 둘러싸고
몸종들이 짐승을 몰아 짐승들이 나타나면 수덕이가 화살을 날리어 잡는 그런 사냥이었다.
몸종들이 나뭇가지를 탁탁 털면서 “우------”하고 몰아오더니 “노루야 노루야”하고 소리쳤다.
수덕은 화살엔 자신이 있었으므로 언덕 아래에 숨어서 활을 조이며 쳐다보고 있는데
정말 송아지만한 노루가 자기 앞으로 껑충껑충 뛰어오고 있었다.
수덕은 바삐 활시위를 잡아당겼다가 딱 멈췄다.
수덕이 어쩐 일인지 화살을 날리지 않고 멈추자
“도련님 노루예요. 어서 화살을 날리세요”
몸종들이 화살을 날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우성이 커질수록 활시위에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끝내 노루를 놓치고만 몸종들은 섭섭해 했지만 그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노루가 뛰어올 때부터 화살이 잡은 노루의 방향에 어여쁜 낭자가 똑같이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노루가 사라지자 뛰어가던 낭자가 자기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선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더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그는 책을 펼쳐도 글씨는 보이지 않고 낭자의 얼굴만 떠올랐다.
그는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자기를 아끼는 할아범 몸종에게 낭자를 찾아보라 했다.
할아범은 여러 마을에 수소문한 결과 바로 건너 마을에 사는 덕숭이란 낭자라 했다.
덕숭낭자는 혼자 살고 있는 낭자로써 그 아름다움이나 마음씨가 고와서 온 마을에서도 뛰어난 낭자란 평이었다.
할아범으로부터 이런 이야기까지 들은 수덕은 더욱 고민하다가 밤에 덕숭낭자의 집을 찾아갔고
낭자 앞에서 자기는 꼭 낭자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우격다짐을 했다.
그랬더니 낭자는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머리를 떨군다.
허나 수덕도령은 꼭 결혼하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새벽닭이 울때까지 덕숭낭자를 졸라댔다.
낭자는 닭 울음소리 따라 머리를 들듯 얼굴을 세우고 수덕을 바라본다.
“저와 결혼을 꼭 하시고 싶으시면 먼저 소녀의 청을 들어주셔야 하겠습니다.
우리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세워 주세요.”
덕숭낭자가 절을 세워달라고 원하자 수덕도령은 쾌히 승낙을 했다.
그날부터 절간을 짓기 시작했다. 많은 인부들이 작업을 해서 그런지 절간은 바삐 지어졌다.
수덕도령은 낭자 집으로 낭자를 찾아가서 절이 지어졌노라고 전했다.
그랬더니 낭자는 하는 말이 “어째서 절을 지으면서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자의 몸을 탐내십니까.
그런 절은 바로 없어집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때였다.
밖에서 “우루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 지은 절간이 부서졌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다.
허나 수덕도령은 다시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불이 나 타버렸다.
수덕도령이 날마다 목욕을 하고 몸가짐은 정돈이 되었으나 마음에 부처님보다
덕숭낭자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 했다.
그는 잿더미 위에 또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엔 참으로 절이 잘 지어졌다. 절이 완성되자 덕숭낭자는 결혼을 승낙했다.
그래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자기 몸에 손을 못 대게 했다.
허나, 어느 날 수덕도령은 참을 수가 없어서 와락 덕숭낭자를 껴안았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문짝이 달가닥하고 떨어지며 이불이 공중에 뜨더니
자기를 밀어 제치고 이불이 둥둥 떠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낭자는 온데 간데 없고 버선 한 쪽만 쥐어져 있었다. 이번엔 천둥의 소리가 났다.
그러자 그들이 살던 집은 불더미가 되고 수덕도령이 앉아있던 자리에 바위가 생겼다.
그리고 그 바위에 버선모양의 꽃이 피었다.
낭자는 관음보살이 화현하여 속세에 와서 살았다 해서 ‘덕숭산’이라 했고
절간은 수덕도령이 지었다 해서 ‘수덕사’라 불리우게 됐다.
수덕사 일주문과 주차장..
덕숭산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德山面)에 있는 높이 495.2m 산..
원효봉과 가야산..
덕숭산 날머리..
계곡장에서 가야산으로도 진행을 많이 하지만
들바람은 동림모텔 좌측으로~
상왕산 원효암이라고 쓰여 있어서 조금 의아했다..
귀가 후 문헌을 찾아보았는데 가야산을 상왕산이라고도 하였다~ㅎ
의상암터..
의상굴..
예산평야..
원효봉 들머리..
원효봉..
국도 45호선..
새벽까지 비가오다가 그쳤는데 시계가 좋아서
천수만과 태안해안국립공원이 보인다~
덕숭산 좌측 몇 해 전 올랐었던 수암산에서 용봉산으로 이어진 마루금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서산은 우측 산등성이 넘어서..
가야산..
원효봉은 충남 예산시 덕산면 상가리에 위치 높이 605m..
정상석이 안보인다..
아름답게 다가오는 예산평야와 옥계저수지~
덕숭산 옆 몇 해 전 올랐던 용봉산에서 수암산으로 이어진 마루금 뒤 중간쯤 내포 신도시에
충남도청이 위치하고 있다..
앞문은 예산 뒷문은 홍성이라고 하는데 서로 반반 현명한 결정을 한 것 같다~ㅎ
충남도청은 예산군과 홍성군 경계에~
좌측이 수암산..
덕숭산은 100대 명산치고는 싱겁다는 느낌이..
덕숭산 절반 이상이 수덕사 소유인 것 같아 조금 씁쓸..
가야산은 충청남도 북부지방을 북·남 방향으로 뻗어 있는 소규모 가야산맥에 속하며,
규모는 작지만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을 간직한 명산이다.
가야산의 높이는 678m이고, 주봉인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 605m),
석문봉(石門峰, 653m), 옥양봉(玉洋峰, 593m) 등의 봉우리가 있다..
원효봉 정상에서~
가야산은 신라 때는 가야산사를 짓고 중사(中祀:나라에서 지내던 제사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현감이 봄, 가을로 고을 관원을 시켜 제를 올렸던 곳으로,
덕숭산(德崇山, 495m)과 함께 1973년 3월에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원효봉 아래서 점심과 마꼴리를 한잔하는데 살에 와 닿는 바람이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젠 바람막이 잠바를 가지고 다녀야할 것 같다..
미역취는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돼지나물이라고도 한다.
산과 들의 볕이 잘 드는 풀밭에서 자란다. 줄기는 곧게 서고 윗부분에서 가지가 갈라지며
짙은 자주색이고 잔털이 있으며 높이가 30∼85cm이다. 꽃이 필 때 뿌리에서 나온 잎은 없어진다.
줄기에서 나온 잎은 날개를 가진 잎자루가 있고 달걀 모양, 달걀 모양의 긴 타원형 또는
긴 타원 모양의 바소꼴이며 끝이 뾰족하고 표면에 털이 약간 있으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줄기 위로 갈수록 잎이 작아지고 폭이 좁아지며 잎자루가 없어진다.
꽃은 7∼10월에 노란 색으로 피고 3∼5개의 두상화(頭狀花:꽃대 끝에 꽃자루가 없는 작은 꽃이 많이
모여 피어 머리 모양을 이룬 꽃)가 산방꽃차례를 이루며 달리고 전체가 커다란 꽃이삭을 형성한다.
두상화는 지름이 1.2∼1.4cm이고 가장자리에 암꽃인 설상화가 1열로 배열하고 가운데에 양성화인
관상화가 여러 개 있다. 총포는 통 같은 종 모양이고 포 조각은 4줄로 배열한다.
열매는 수과이고 원통 모양이며 관모는 길이가 3.5mm이다.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다.
한방에서는 식물체를 일지황화(一枝黃花)라는 약재로 쓰는데, 감기로 인한 두통과 인후염,
편도선염에 효과가 있고, 황달과 타박상에도 쓰며, 종기 초기에 즙액을 붙인다. 한국·일본에 분포한다.
가야산에서 석문봉과 옥양봉으로 이어진 마루금..
팝배나무 열매가 가을을 알리고 있다~
뒤돌아본 원효봉..
가야산 들머리는 반사경 10여m 위 우측~
산딸나무 열매..
뒤돌아 본 원효봉..
상가리저수지 우측 위는 남연군묘..
가야산(伽倻山)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과 서산시 운산면, 해미면에 걸쳐 있는 높이 678m 산..
가야산은 상왕산(象王山)이라고도 하였다..
석문봉에서 옥양봉으로 이어진 마루금이 아름답게 다가오지만 가야산에 도착하였을 때 15시 05분..
계속 진행하기에 시간이 조금 어정쩡한 것 같아 상가리로 하산..
수덕사에서 경내를 둘러보느라 너무 오래 머물렀다..
가야산 정상에서 정상석을 못찾았는지 없는지 안보였다..
봉림저수지 뒤는 삽교호와 아산만 뒤로는 당진..
비가 그치고 나서 시계가 좋아 멀리 보인다~
상가리저수지 우측 위 남연군묘 옆에는 가야사지를 발굴하고 있는 중..
흰고마리..
물봉선..
보석 같은 고마리~
조금 먼것 같아 상가리저수지를 건너지 않고 직진~
남연군묘..
남연군의 본관은 전주(全州). 처음 이름은 채중(寀重)이었으나, 은신군에 양자로 입적하면서 구(球)로 개명하였다..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麟平大君)의 6세손(世孫) 병원(秉源)의 둘째 아들이자 고종의 생부(生父)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자 은신군(恩信君) 진(禛)은 숙종의 여섯째 아들 연령군(延齡君)의 손자로 입양되었고,
은신군이 후사가 없어 남연군이 그의 양자가 되었다. 1
815년(순조 15) 수원관(守園官), 1821년 수릉관(守陵官) 등을 지냈다.
1829년(순조 29) 영조와 진종(眞宗) 및 정조의 어필을 간행하여 보존할 것을 상소하였고,
1834년에는 공조판서 김유근 등과 함께 종척집사(宗戚執事)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남연군의 묘는 경기도 연천에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충청도 덕산(德山:예산군)으로 이장하였고,
현재 그의 신도비는 지방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1868년(고종 5) 독일의 상인 E.J.오페르트 등에 의하여 묘가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골 조그마한 화장실이 음악도 나오고 잘관리되고 있다~
화장실을 보면 그곳 수준을 알 수 있다~
박수를 보내고 싶다~
발굴이 진행 중인 가야사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당시 조선 최고의 지관(地官) 정만인으로부터 최고의 명당이
충남 예산의 가야산에는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인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가 있고
충남 보령의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자리인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들었다..
때마침 당시 안동김씨 일파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던 흥선대원군은 왕권에 대한 야욕이 컸기 때문에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가야산의 이대천자지지 터로 이장을 하였다.
지관 정만인이 꼽아 준 이장을 해야할 묘지 터에는 가야사라는 사찰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권력에 대한 야망이 컸던 대원군에게는 절 따위는 문제 될게 없었다.
대원군은 사람을 시켜 가야사를 하루아침에 불 질러 버리고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였다.
가야산과 석문봉, 옥양봉 갈림길..
좌측 가야봉이나 우측 옥양봉 어느쪽에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다~
활엽수가 많은 가야산과 석문봉, 옥양봉은 가을에 무척 아름다울 것 같다~
산행 시간도 적당할 것 같다~
상가리정류장(마을회관)은 우측으로~
상가리 정류장(마을회관}..
덕산버스정류장에서 상가리종점(마을회관)은 1일 4회 운행 10여분 소요..
10 : 00, 14 : 20, 17 : 20, 15 : 00
상가리종점(마을회관)에서 덕산버스정류장은 1일 4회 운행..
06 : 50, 10 : 10, 17 : 20, 19 : 00
택시를 이용하면 운임은 7,000원
연락처 041-337-1818, 041-338-1818
남연군묘도 찾아보고 쉬엄쉬엄 하산을 하였는데도 1시간 가량 시간이 남아 택시로 덕산으로 이동..
시간이 이렇게 많이 남을 것 같았으면 석문봉과 옥양봉을 들려볼걸하는 생각도..
덕산까지 택시비 운님은 7,000원 10여분 소요..
덕산버스정류장에서 7시 00분 예산행 버스로 예산역으로..
40여분 소요, 1,300원..
예산역에서 18시 15분 용산행 새마을호를 타고 영등포역으로..
1시간 32분 소요, 11,300원..
그 또한 내 마음이려니 / 최영록
마른 햇살들 으스스
웅크린 담벼락에 떨어진다
바싹 여윈 귀뚜라미 등짝 위
가랑잎 한 잎 툭, 떨어진다
토실한 벌레들 나무 구멍 땅 구멍
온몸으로 따스한 구멍 찾아든다
모두들 떠나고 제 집 찾는 계절의 막장
찬 기운 여윈 마음 얼어붙는
상강(霜降)
서리 맞은 이파리들
선명하게 멍울지는 아픔
갈 데 없는 꽉 찬 그리움.
시계가 좋아서 예산 홍성 서산 당진 태안해안국립공원 천수만 아산만이 보였고
석문봉과 옥양봉으로 진행을 못했지만 대신에 남연군묘를 찾아 볼 수 있었고
덕숭산은 100대 명산치고는 싱거웠는데 수덕사는 덤으로 찾았던 산행~
언제 : 2013년 9월 25일
어디 : 수덕사-덕숭산-동림모텔-사방땜-원효봉-가야산-상가저수지-남연군묘-상가리정류장(마을회관)
산행 시간 : 09시 50분 ~16시 28분
날씨 : 새벽까지 비 이후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