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암 / 이수인
밤 깊은 연주암에도 가을은 찾아와
소슬바람에 풍경소리만 적막을 깨우는 구나
세상살이 지치고 곤고한 사람들
발걸음 멈추어 법당 툇마루에 잠시 몸을 기대인다
팔월이라 대보름 만월은 차고 올라
연주암 법당 안으로 유유히 흘러드누나
홀로 기도하는 저 여인이여
어긋난 인연 있거든 붙잡지 마시오
보낼 때 미움으로 화를 품지도 마오
계절도 자리를 물려줄 때를 아는 법
살붙이 같은 초록도 떨구기 위해
고운 때갈 옷을 입힌다오
스스로 보내지 못한 낙엽은
바람이 실어가나 남겨진 빈 가지는
겨우내 울음 우는 구나
우주 삼라만상에
아프지 않는 이별은 없으리니
헤어진 뒤 이미 평안을 얻었다면
서로 애틋했다 말할 수 없음이려니
나그네여
붙잡지 못한 인연 있거든
저 바람 속에 흘러 보내시게나
아쉬움이 남아야 다시 연주대를 오르리니
오늘 같은 밤이나 달도 평생에 한번이로다
암자에 바람이 차고 구름이 앞을 가리워도
달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 구나
나그네여
날이 밝아 온다 해도 쉬엄쉬엄 가시게
가져온 고뇌는 암자 절벽 밑으로 던지시고
아득한 세상 한 자락 붙잡고 허허 웃으시오
사는 게 별거냐고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속의 칼을 버려라 (0) | 2009.01.30 |
---|---|
흐린날도 비온날도 있답니다 (0) | 2007.05.04 |
존재, 그 쓸쓸한 자리 / 이해인 (0) | 2007.04.27 |
아내의 마지막 편지 (0) | 2007.04.25 |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 (0) | 2007.03.09 |